happy birthday

from 기록 2016. 11. 29.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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뾰족하게 깎은 연필을 손등에 내리찍는 상상을 한다. 나는 연필을 깎고 또 깎아 예리하게 만든 다음 양 손을 책상위에 놓고 손가락 틈 사이로 왔다갔다 빠르게 연필을 내리꽂는다. 오른팔에 힘을 줄수록 왼손을 향한 연필의 동작에 긴장이 더해진다. 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손가락 위에 연필심이 박히거나 피가 나지만 그 고통이 싫지 않다. 외갓집에 들를 때면 외삼촌의 방에 들어가 그가 그린 도면의 모서리에 라이터의 불꽃을 댄다. 도면의 여백이 안쪽으로 말리며 까만 재를 흩날린다. 나는 입으로 바람을 불어 불을 끄고 아무렇지도 않게 외삼촌의 방을 나온다. 모든 불이 꺼진 집에 들어와 화장실에 들를 때면 누군가 목을 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마음속으로 하나, 둘, 셋을 외치며 문을 열곤 했다. 늘 그렇듯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시간은 무료하게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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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 다녀왔다.

from 기록 2016. 11. 6. 01:47

어제 광화문에 다녀왔다. 글쓰기 모임에서 알게 된 분과 함께였다. 집회는 처음인데다가 살수차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이나 떨었는데, 다행히도 질서를 지킨 사람들 덕분에 별 탈 없이 집에 도착해 이 글을 쓰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반대 촛불시위 때도,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때에도 조용히 있던 내가 오늘 처음으로 집회에 나섰다. 집에만 있기가 부끄러워서다.

오늘 광화문에서는 남녀노소 모두가 ‘박근혜는 하야하라, 박근혜는 퇴진하라’를 외쳤다. 광화문 일대가 함성으로 가득찼다. 행진은 광화문에서 시작하여 종로와 종각 일대를 지나 을지로로, 시청으로 이동했다가 다시 세종대로 사거리로 돌아왔다. 평화적인 시위였기에 겁먹지 않고 행진에 참여할 수 있었다.

행진하는 무리 중에는 대학생, 직장인, 아이를 데리고 나온 평범한 부부들이 보였다. 특히 교복을 입고 나온, 앳되어 보이는 중학생도 볼 수 있었는데 그들을 보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그들 나이 때 정치와는 담을 쌓고 지냈으며 내 본분은 공부라고 생각했다. 대학생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일상이 정치와 맞닿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열심히 일하면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회사의 사탕발림에 속아 스스로를 노예처럼 생각하던 그때,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며 받았던 상처들, 새벽까지 열심히 일해도 채 150만원도 되지 않는 돈을 받아 학자금을 갚기 위해 허덕이던 날들, 상사로부터 성적인 농담을 들어도 인턴이라는 신분 때문에 하소연할 수 없었던 일 등등. 사회 구조가 불합리하다 느끼지만 각자도생이라는 말에 조용히 숨죽이며 살아왔다. 그러다 우연히 유범상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소통과 연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오늘 내가 처음으로 광화문에 나선 것도 따지고 보면 유범상 교수님 덕분이다.)

이야기가 옆으로 샜는데 어쨌든 약자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어이자 공격은 연대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오늘, 국민들의 의견을 묵살하는 거대 권력 앞에 많은 이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위에 가담한 수장을 끌어내리기 위해서다. 같이 슬퍼하고 같이 분노하는 모습에서 희망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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