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춘기의 주된 증상은 무기력이었다. 당시 나는 학교-집-학원만을 오가며 숙제로 가득한 하루를 보냈다. 평일은 학원 숙제, 주말에는 과외 숙제를 마치기에도 벅찼다. 혼자만의 시간조차 부족했던 나는 쉬는 시간이 되면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는 책상에 엎드려 꿈속을 헤맸다. 열일곱이 되었을 때, 이런 나를 무리에 끼워준 친구들이 있었다. 지혜는 내가 속한 그룹의 일원이었다. 지혜는 조금 특이한 친구였다. 당시 나는 사람의 장단점을 파악하여 나와 친해질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분류하여 대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지혜는 판단이 어려운 아이였다. 일본 애니메이션과 일본 밴드를 좋아하면서도 그런 아이들이 풍기는 과한 매니아틱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반에서 중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하면서도 모범생 특유의 오만함이 없었다. 저 아이에게도 내가 모르는 단점이 있을 것이다. 유쾌한 지혜의 행동은 한없이 삐딱한 내게 자기 방어적인 태도로 보였다. 지혜는 친구들과 농담을 나누다가도 갑자기 말이 끊기는 어색한 순간이 찾아오면 눈을 위로 치켜뜨며 엉뚱한 표정을 짓거나 본인의 신체 콤플렉스를 소재로 삼아 분위기를 띄우던 아이였다. 농담이라도 타인의 단점을 웃음거리로 삼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손은 작지만 손 글씨가 정갈한 지혜와 친해지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너무 바빴고, 지혜는 나에 대한 관심이 부족해보였다.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문학 수준별 이동학습 시간에 지혜와 짝이 된 것이다. 나는 특유의 무신경함을 가장한 채 옆자리에 앉은 지혜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수업시간에는 조용히 집중하며, 필기를 하는 평범한 학생의 모습이었다. 친하다는 핑계로 내게 쓸데없는 잡담을 거는 무례함은 없었다. 타인의 경계를 존중하고, 본인의 영역을 지키고 싶어하는 아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 이상의 정보는 없었다.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법을 모르는 나는 지혜와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을 접고 끝없는 과제와 퀴즈에 매달렸다. 2002년 2월, 종업식을 앞두고 누군가 카메라를 가져왔다. 인화한 사진을 돌려보는데, 사진 속의 나는 평소와 다르게 환히 웃고 있었다. 친구들은 실물보다 사진이 낫다며 놀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지혜가 정색을 하며 엄청난 말을 쏟아냈다. “통통해서 그렇지 항아리 본판이 원래 이뻐. 이마도 나와 다르게 동그랗고 볼록하잖아. 콧대도 높은 편이고, 얼굴도 좌우 대칭이 맞지. 공부도 빠지지 않지, 팔방미인이야. 항아리, 내가 널 얼마나 부러워했다구." 민망함에 나는 지혜의 말을 끊었던 것 같다. 민망함보다 가슴이 뛰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거다. 열일곱의 나는 어떤 것으로부터도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서른이 되면 실비아처럼 죽어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지독히 부정적인 아이였다. 이런 내가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존재라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안타까웠다. 왜 진작 친해지지 못했을까. 십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지만, 내가 부럽다고 고백하던 친구의 얼굴 표정, 순간의 느낌, 교실의 분위기는 기억에 또렷하다. 내가 농담으로라도 남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이유 중 하나다.

2013/12/05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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