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농

from 기록 2014. 11. 8. 18:56

- YMCA 피아노 학원 풍경들

- 30cm 플라스틱 자로 손등을 때리던 히스테릭한 여자 선생님

- 다른 학생들의 연주를 듣고 음을 따라 치던 나

- 연주를 듣는 능력 (절대음감)은 뛰어나지만, 연주에는 재능이 없던 나

- 피아노 학원 수업의 절반은 이론, 나머지는 실기 수업이었음

- 건반에 지문 자국이 있으면 불쾌하여 빨간 융으로 닦던 기억

- 피아노 의자를 열면 책을 보관해 둘 수 있게 되어 있어 책을 두고 다녔는데 어느날 잃어버림

- 하농을 네 가지 버전으로 연주함. (오리지날, 스타카토, 당김음, ?)

- 하농의 녹색 표지는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단순하지만 다섯 손가락을 고루 움직여야 했으며, 다른 버전으로 연주를 해야 했기에 지겨웠지만 그만큼 중독적인 구석이 있었다. 

- 거금을 들여 부모님이 피아노를 사 주셨고 친척들이 집에 놀러오는 날이면 피아노를 쳐 보라며 나를 채근하셨다. 나는 스스로 피아노 연주를 잘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피아노를 칠 줄 안다는 사실에 허영을 느껴 내가 유일하게 틀리지 않고 외우고 있는 곡만을 연주했다. 다른 곡도 쳐 보라는 성화가 이어지면 난처해하던 기억이 난다. 가세가 기울면서 피아노는 애물단지가 되어 버렸다. 전셋집을 전전하며 포장이사를 할 때마다 피아노 때문에 이사 비용이 더 들어간다며 엄마는 내 만류에도 불구하고 피아노를 팔아버렸다. 피아노를 자주 쳤던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한스럽다.

- 피아노 학원의 연습용 피아노는 조악해서 자주 고장이 났다. 특정 건반이 뻑뻑하다던가, 눌러도 소리가 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었음. 

- 중학생 때 축제에서 동갑내기 남학생이 피아노를 연주하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축제 때 연주하던 곡은 음역대가 넓은 (쇼팽곡이었나? 다시 찾아볼 것.) 곡이었는데, 말 그대로 건반 위에서 손가락이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그 남학생의 이름을 지금도 잊어버릴 수 없다. '김고'라는 학생이었는데, 당시 내 단짝이었던 명일이와 같은 반 학생이었다. 여자 음악 선생님은 대놓고 그 학생을 편애했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하지만) 초등학생 때 내가 학원에서 듣던 연탄곡이나 체르니와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 2014년 4월, 경향 콩쿨에서 대기실로 이동하기 전 연습실로 참가자들을 인솔하는 역할을 맡았다. 한 학생은 연습시간 동안 지정곡을 연습하는 게 아니라 하농을 연주하며 손을 풀더라. 이걸 보니 옛 생각이 났다. 


2013/11/06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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