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력

from 기록 2014. 11. 8. 18:57

계획보다 3시간 늦은, 오전 10시 30분쯤 기상했다. 자취방 침대에 모로 누워 책을 뒤적이지만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다. 헤어진 남자친구 생각이 자리를 차지한 탓이다. 홀로 보내는 시간이 많아 생각난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이 따로 놀아 괴롭다. 사귈 때 내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점이 후회된다. 밀린 설거지를 끝내고 이소라의 노래를 들으며 설익은 꽁치구이와 된장국을 먹었다. 이소라의 뮤즈는 누구였을까? 다시 책을 읽는데, 한글 독해가 왜 이렇게 어렵나. 모교 도서관에 가볼까 싶었지만 만사가 귀찮다. 상담 선생님이 내준 숙제를 해야 한다.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나는 must와 want를 구분하기 어렵다. 내 진짜 want는 무엇인가? 전날 편집자로 일하는, 모교 졸업생으로부터 받은 명함을 떠올렸다. 메일을 보내볼까 고민했지만, 내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는데 목적 없이 연락은 해서 뭘 하나 싶다.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올해 초 저장해둔 이시형 박사의 심리학 특강을 시청했다. '외톨이' 편을 보다가 놀랐다. 아, 내가 은둔형 외톨이였구나. 사람을 만나지 않고 어딘가에 틀어박혀 영화만 보던 때가 떠올랐다. 환청이 들리지는 않지만 조짐이 비슷하다. 위험하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교육원 출신 Y씨에게 독촉 메시지를 보냈다. 며칠 전 Y씨가 미취업자 교육생들을 필진으로 하는 블로그를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낸 터였다. 블로그 개설을 확인하고 글렌굴드의 곡을 들었다. 원룸 사람들이 내는 소음 때문에 허밍을 들을 수 없다. 방문을 세게 닫고 발꿈치로 장판을 찍으며 빠르게 걷는 학생들의 소음에 신경이 곤두서고 손발이 차가워진다. 조용한 공간으로 이사를 가기 위해서라도 돈을 벌어야겠다. 화를 참고 마르코 복음서를 필사했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창밖이 어둑하다. 교육원에서 입금한 교육비를 확인했다. 다음 달 월세 시름을 덜었다. '은둔형 외톨이'에서 벗어나고자 JS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이성문제를 하소연했다. 채근담을 읽는데, 실천이 어렵다. 꼭 순행대로 살아야 하나? 예술가와 사업가는 역행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난 예술가는 아니지만, 순행을 강조하는 동양 철학보다 천주교의 율법이 마음에 와 닿는다. 동양 철학이 수직이라면 서양의 사상과 종교는 수평에 가까운 느낌이다. 지젝과 향연-美에 대한 글도 써야 한다. 짧게 대충 아는 내용만 쓸까, 하는 유혹이 들었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내용 파악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쓰는 글은 (과장을 섞어 표현하자면) 쓰레기다. 갑자기 공기가 싸늘하게 느껴져 드립 커피를 만들어 마셨다. 저녁에는 근처 대형마트에 들러 대파와 라면, 토마토케첩을 사왔다. 혼자 지내는 생활이 너무나 익숙하다. 언제까지 이런 하루를 보내야 하나?


2013/11/06 0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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