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아버지를 생각하며

from 기록 2014. 11. 9. 08:55

나는 외가의 첫 손주다. 덕분에 외가 어른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외할아버지가 특히 좋았다. 내가 놀러갈 때마다 매번 천원을 건네 주셨고, 인자하게 웃어주셨으며, 잔소리 한 번 없으셨기 때문이다. 공부를 핑계로 방문이 뜸해진 외손녀에게 싫은 내색 한 번 없으셨다. 농사를 지으신 탓에 외할아버지는 동년배 어르신들보다 건강하셨다. 그래서 우리 외할아버지는 평생 늙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으실 줄로만 알았다.

 

 

외할아버지 팔순잔치를 치르고 일주일 쯤 지나, 엄마는 어지러움을 호소하는 할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을 찾았다. 그날 엄마는 내게 문자 메시지로 ‘lung cancer’의 뜻을 물었다. 외할아버지가 폐암에 걸렸다. 나는 ‘어떡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인터넷과 책을 찾아 폐암 정보를 수집했다. 요약한 정보를 출력하여 친지들에게 전달하고, 암 투병 서적을 들고 무거운 마음으로 병원을 찾았다.

 

 

외할아버지는 산소 호흡기의 도움을 받으며 초진 결과를 기다리고 계셨다. 자주 찾아오겠다 말씀드리니, 자주 오지 말라신다. 외손녀에게 부담주기 싫어하시는 마음이 전해졌다. (그날 이후 실제로 자주 찾아뵙지 못했다.) 병실을 떠나며 암 투병 서적을 책상 위에 두려는 순간이었다. 외할아버지께서 책을 가져가라며 단호하게 손을 내저으셨다. 아, 부끄럽지만 당시 내 태도는 ‘도리를 다한다.’는 자기만족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외할아버지는 통원 치료를 결정하셨다. 퇴원 직전에 친척들이 보고 싶어 병원으로 부르셨다는데, 속뜻을 알 수 있었다. 나 역시 더 늦기 전에 남자친구를 데리고 외가를 방문했다. 폐암 진단 이전에 심근경색으로 고생하신 할아버지는 심장 수술을 앞두고 계셨다. 거동이 불편하심에도 등을 꼿꼿이 세워 앉아 예의로 외손녀의 남자친구를 대하셨다. 하지만 나는 방문 목적을 잊고, 남자친구가 외가 친척들에게 어떤 이미지로 보일지에만 급급했다. 외조부께 인사만 드리고 근황이나 안부조차 묻지 않았다. 이 글을 쓰는 지금에서야 깨달은 사실이다. 후회가 밀려온다.

 

 

외가 거실에는 십년 전 일가친척들이 모여 찍은 사진이 걸려있다. 내 얼굴은 없다. 수능 공부 핑계로 불참했기 때문이다. 외할아버지 생신날 한 공부로 수능 성적이 얼마나 올랐을까? 돌이킬수록 내 이기심이 부끄럽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대해주신 외할아버지의 넓은 아량에 감사할 뿐이다.

 

 

방사선 치료가 회를 거듭할수록 힘든 싸움이 될 것이다. 외손녀가 여태껏 저지른 실수를 만회할 시간을 주셨으면 한다. 증손녀 볼 때까지 건강하시기를. 외할아버지, 사랑해요.


2013/06/04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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