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고급문화

from 기록 2014. 11. 8. 15:57
이메일 계정을 뒤적이다가 학부생 때 '미래의 고급문화'를 주제로 제출한 글을 발견했다. 허황하기 이를 데 없는 주장에, 여러모로 부끄러운 글이다. 어쩌면 이때부터 망상 비슷한 병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부끄러운 과거도 내 일부니까 일단 옮겨둔다

 

(2008년 8월 10일에 쓴 글)

 

미래의 고급문화를 논하기에 앞서, 고급문화의 정의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키치의 정의에 착안하여 키치의 구성 원리와 반대되는 것의 조합을 고급문화로 정의하기로 했다. 키치는 한 분야에 국한된 용어이지만 그 특성이 수업시간에 배운, 대중문화의 기운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키치의 특성을 통해 그와 반대되는 고급문화의 특성을 정의하기로 했다. 키치를 만드는 다섯 가지 구성 원리를 나열해보자면 아래와 같다. (http://kr.blog.yahoo.com/surkhun74/4624 참고)​

 

1) 부적합성의 원리 : 본래의 목적뿐만 아니라 동시에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는 과정에서 형태, 크기, 형식적 내용 등이 부적절하게 결합되는 것.

2) 축적의 원리 : 형식, 내용, 기능 등의 밀집을 통해 스스로를 눈에 띄게 하는 것.

3) 공감각의 원리 : 다양한 감각 영역을 동시에 자극하는 것.

4) 중용의 원리 : 모든 영역에서 발견되는 이질적인 것들을 혼합하여 집단적 표준화라는 중간적 위치로 위치 시키는 것.

5) 쾌적함의 원리 : '편안하게 살자'는 사고방식으로 사물의 성격을 놀이에 가깝게 마구잡이식으로 선택한 것.

 

거꾸로 생각해보자면 이와 반대되는 것이 고급예술(=고급문화)이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키치의 속성을 통해 내가 간추린 고급문화의 정의는 본질 그 자체만으로도 순수하게 가치가 성립될 수 있고 천박해 보이지 않아야 하며 오로지 한 감각 영역만을 자극하는, 이데올로기가 배제된, 다소 불편(쾌락과는 거리가 먼) 하고 대중들이 소유하기 힘든 무엇.”이 되겠다.

 

위 정의를 통해 인터넷이나 p2p를 통해 누구나 손쉽게 공유 가능한 모든 것은 고급문화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상, 음원, 서적은 고급문화나 고급예술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정보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는 추이를 생각한다면 미래로 갈수록 영상이나 음원, 서적의 접근성이 높아지면 높아지지, 낮아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 매체로 대체 가능한 모든 것은 미래의 고급문화가 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여기서 미래 고급문화의 범주가 단번에 압축된다. 매체가 전달해 주지 못하는, 하지만 인간이 가장 느껴보고 싶은 본질적인 욕구가 무엇일까. 바로 죽음이다. 우리는 영상매체를 통해 성욕과 식욕을 느끼지만, 죽음의 느낌만큼은 온전히 느낄 수가 없다. 기껏해야 영상매체 속 연기자의 모습을 통해 가짜 감정을 느끼는 것뿐이다.

 

죽음에는 생명이라는 개념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 천박하게 생각하려고 해도 천박하게 생각할 수 없으며 순수한 인간 본연의 말초적인 욕망이 내재되어 있다. 물론 내가 주장하려고 하는 것은 그냥 죽음이 아니다. 사고사나 돌연사가 아닌, 스스로의 의지로 목숨을 끊는 죽음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불치병으로 인한 죽음이나 예상치 못한 사고사, 명예살인을 제외한 죽음에는 이데올로기가 개입하기 어렵다. 애당초 뽕의 기운을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자살'이 어떻게 고급문화가 될 수 있느냐는 반론이 제기될 것이다. 잘 생각해보자. 과거에 비해 스스로 목숨을 끊기가 쉬워졌나?

복지 기관에서 친절히 독거노인들에게 매일 안부전화를 거는 세상이다. 누군가가 외딴곳에서 자살을 시도해도, 지나가던 행인이 이를 보았다면 휴대폰으로 119에 신고할 것이고 119GPS 시스템을 통해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외딴길을 자동으로 추적해 10분 내에 출동할 것이다. 미래에 기술이 발전한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는 방법이나 수단은 늘어날지 몰라도 자살을 시도하는 행위 자체는 더욱 어려워지지 않을까? 먼 훗날에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정부에서 평생 개인 프로파일을 만들어 자살 가능성이 높은 아이들을 감시하는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

갈수록 세력을 확장하는 종교 문제도 자살의 어려움에 한몫한다. 기독교, 천주교, 불교를 비롯한 대부분의 종교들은 자살을 터부시한다. 지금보다 문명이 더욱 발전할 미래에는 아프리카 오지에서도 컴퓨터를 사용할 날이 올 것이고, 그때쯤이면 이미 토속신앙이 아닌 불교나 기독교가 아프리카에도 굳건히 자리매김할 것이다. 다른 나라로 도피를 해도 자살이 거의 불가능해지는 시대가 온다는 말이다.

 

국가나 종교처럼 세력 있는 집단들은 왜 자살을 인정하지 않을까. 언제부터인가 국가는 개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개입해왔다. 국가에 속한 개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는 기존 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가장 극단적인 행동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자살이 더욱 힘들어지는 미래가 온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는 그 자체로 소수들의 전유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살이라는 행위 자체가 취향의 문제로 바뀔 수 있다는 말이다. 고급문화의 구별짓기와 취향의 구별짓기는 종이 한 장 차이다.

 

취향(취미)의 문제를 생각해보자. 취향을 정말 순수한 취향 자체로 생각할 수 있나? 우리는 먹고 자는 것을 취향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좋던 싫든 간에 취향으로 내가 타인으로부터 판단될 수 있기 때문에, 취향에도 구별짓기의 개념이 들어가 있다. 보보스족이 일반인들과 구별짓기 위하여 국내에서 즐기기 어려운 취미만을 추구했듯이.

 

우리는 특정 장르의 영화를 좋아한다던가, 특정 브랜드의 백을 구매하여 드러냄으로써 남에게 내 취향을 알린다. 그렇다면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고 기술이 고도로 발달하는 미래 사람들의 취향은 어떻게 바뀔까? 소비가 아닌, 남과 다른 행동을 취하는 것 자체가 취향이 될지도 모른다. 특히 그 행동이 남들은 쉽게 취할 수 없는 행동이라면 더더욱 고급스러운 취미로 인식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래의 자살은 누구나 할 수 없는 것, 즉 완벽하게 고급스러운 취향이 될 수 있다.

결국 힘겨루기 이야기이다. 자살이라는 행위 자체가 고급예술, 혹은 고급문화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소리다. 아름다움, 순수성, 표현성, 상징성, 현실성, 절대성이 완벽하게 들어가 있는 것이 자살이다.

 

조금 더 상상력을 발휘해보자면 자살이 고급문화가 되는 시대에는 이를 모방한 문화가 생길지도 모른다. 회사는 고객에게 돈을 받고 뇌의 일정 부분을 자극해주어 죽음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식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서비스가 고급예술이 될 수 있을까? 오히려 자살하는 행동 자체와 나누어져 저급문화가 될 가능성이 크다. 죽음을 느끼는 서비스는 누구나 돈만 있으면 여러 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살이 행위 자체는 한 번 밖에 경험할 수 없다. 특히나 자살이 강력하게 통제되는 미래에는 자살이라는 행위 자체가 굉장한 상징적, 우월적 의미가 개입되기 때문에 고급문화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예술이나 문화라는 것은 본질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외부적인 힘의 변화에 의해 상대적으로 정의되는 것이다. 뒤샹이 가져다 놓은 변기 자체에서 아우라를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다. 대부분 기존의 예술 체계를 뒤엎은 뒤샹의 행위 자체를 높이 평가한다. 자살도 같은 맥락이다. 어떻게 자살이 고급문화가 될 수 있지? 라는 물음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자살이 희소성을 갖게 되는, 고급문화가 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조건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