뾰족하게 깎은 연필을 손등에 내리찍는 상상을 한다. 나는 연필을 깎고 또 깎아 예리하게 만든 다음 양 손을 책상위에 놓고 손가락 틈 사이로 왔다갔다 빠르게 연필을 내리꽂는다. 오른팔에 힘을 줄수록 왼손을 향한 연필의 동작에 긴장이 더해진다. 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손가락 위에 연필심이 박히거나 피가 나지만 그 고통이 싫지 않다. 외갓집에 들를 때면 외삼촌의 방에 들어가 그가 그린 도면의 모서리에 라이터의 불꽃을 댄다. 도면의 여백이 안쪽으로 말리며 까만 재를 흩날린다. 나는 입으로 바람을 불어 불을 끄고 아무렇지도 않게 외삼촌의 방을 나온다. 모든 불이 꺼진 집에 들어와 화장실에 들를 때면 누군가 목을 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마음속으로 하나, 둘, 셋을 외치며 문을 열곤 했다. 늘 그렇듯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시간은 무료하게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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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자신만이 옳다고 여기는 노인이 있었다. 노인은 매사에 까다로웠다. 특히 음식에 관해서는 더욱 그랬다. 부인이 만들어준 음식은 물론이고 자식들이 맛집이라고 데려간 음식점에서도 한 젓가락을 집어 입에 넣은 뒤 나름의 품평을 하는 것이 그의 오랜 습관이었다. 문제는 대부분의 음식이 그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노인이 외식을 하자고 말하면 자식들은 서로에게 아버지를 모시고 가라며 떠밀기 일쑤였다. 오직 한 사람, 그의 부인만이 40년이 넘도록 그의 비위를 맞추어주었다. 대부분의 자식들이 그렇듯 이 집안의 자식들도 어머니의 인내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정기검진을 받으러 병원에 들른 노인은 자신이 당뇨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평소에도 건강에 신경을 많이 쓰던 자신이 왜 당뇨에 걸렸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홀로 생각에 잠긴 노인은 전라도 토박이인 아내가 만든 음식의 간이 너무나 세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병원에 다녀온 이후로 노인의 음식 투정은 더욱 심해졌다. 아내가 평소 노인이 좋아하던 장아찌를 밥상 위에 올리는 날이면 "날 죽일 셈인가"라고 말한 뒤 숟가락을 탁-소리가 나게 밥상 위에 던지고 돌아앉곤 했다. 한평생 남편의 성격에 기를 죽이고 살아온 아내의 분노가 쌓이기 시작했다.

노인이 등산을 다녀온 날이었다. 고된 산행에 지친 나머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노인은 마루에 쓰러졌다. 아내가 노인을 발견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도 일어날 줄을 몰랐다. 다급해진 아내는 앰뷸런스를 불러 병원으로 향했다. 의사는 저혈당으로 인한 쇼크라고 했다. 포도당 주사를 맞히고 나서야 노인의 의식이 돌아왔다. 기운을 차린 노인은 다음날 병원밥을 한 숟갈 떠먹더니 쌍시옷이 들어가는 말을 내뱉으며 숟가락을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괜시리 아내에게 반찬 투정을 하는 노인이었다. 아내는 앰뷸런스를 부른 내가 병신이지, 라며 식판을 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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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봄이 되면 다양한 나물을 밥상 위에 올렸다. 입춘이 지나면 외가에서 직접 냉이를 캐어와 누런 잎을 떼고 다듬어 살짝 데쳐 무치거나 국을 끓였다. 냉이를 넣은 된장찌개는 구수하기 그지없었다. 달래는 수염뿌리를 잘라 물로 씻은 뒤 짧게 끊어 간장과 고춧가루로 만든 양념장에 넣었고, 우리는 이 양념장에 갓 지은 밥을 비벼 먹었다. 식초와 간장, 고춧가루와 깨소금, 참기름을 넣은 돌나물은 씹는 맛이 좋았다. 고추장에 빨갛게 무친, 쌉싸름한 씀바귀는 내가 서른이 넘어서야 좋아하게 된 반찬이다. 통통한 두릅 역시 씹기 불편하여 어릴 때는 꺼린 음식이었다. 지금은 무르지 않게 살짝 삶아낸 두릅을 젓가락에 돌돌 말아 초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느껴지는 독특한 향을 좋아한다.

여름이 되면 엄마는 빨간 냉면 양념장을 한가득 만들어두었다. 집에 손님이 방문하면 즉시 칡면을 삶아내 양념장을 부어 삶은 계란을 올린 비빔냉면을 대접하기 위해서다. 혀가 얼얼해지는 냉면의 매운 맛에 중독된 사람들은 여름이 되면 어김없이 냉면을 먹으러 우리집을 찾아왔다. 엄마는 유난히 더위를 타는 동생을 위해 얼음을 띄운 냉미역국을 만들어두었다. 새콤한 냉미역국을 들이키면 얼굴 위로 흐르는 땀을 잊을 수 있었다. 복날이면 국내산 토종닭을 구해와 밤, 인삼, 대추를 넣고 푹 고아 백숙을 만들어 먹였다. 쫄깃한 닭가슴살과 찹쌀을 씹고 육수를 들이키면 속이 든든해졌다.

짭쪼름한 양념이 배인 무를 씹는 식감이 일품인 고등어 조림이 밥상 위에 올라올 때면 가을이다. 입맛이 없을 때면 밥에 물을 말아 칼칼한 고등어 살을 발라내 먹었다. 찰랑거리는 덩어리를 썰어 양념장에 찍어 먹는 도토리묵 역시 일품이었다. 손이 큰 엄마는 곱게 간 국내산 도토리 가루를 구해와 물에 풀어 끓인 다음 굳혀 한가득 묵을 만들어 친척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겨울이 되면 엄마는 늙은 호박의 속을 파내 은근하게 달큰한 호박죽을 만들었다. 테두리가 황금색으로 빛나는 호박씨는 한 데 모아 말린 뒤 껍질을 까먹는 재미가 있었다.

주방에서 이 모든 음식이 뚝딱 만들어지는 동안 나는 방에서 책을 읽었다. 음식과 집안일은 엄마의 몫이고 나는 그저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는 게 효도라고 알고 있었다. 

각양각색의 찬이 차려진 밥상 앞에 식구들이 앉으면 자리가 부족했다. 그럴때면 엄마는 주방 한켠에 쪼그리고 앉아 양푼에 고추장, 나물, 헌 밥을 넣고 비벼 먹었다. 국은 늘 따뜻했고 밑반찬은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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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머니에는 담배 한 갑과 라이터가 들어있었다. 그녀는 호프집을 빠져나와 길모퉁이에 주저앉아 담배를 피웠다. 어디선가 희미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반대쪽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연락처를 훑었다. “씨발.” 그녀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욱여넣은 뒤 입에 문 담배를 바닥에 던져 힐로 비벼 불을 껐다. 아스팔트 위로 나이트클럽 홍보 전단지와 쓰레기가 나뒹굴고 거리의 사람들은 짝을 지어 다녔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호프집 계단을 올라갔다. 일찍 취한 사내들이 큰 소리로 웃고 있었다. 그녀는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맥주를 들이마셨다. 식어버린 안주를 하나 집어들었다가 곧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집에 가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한 그녀는 발을 끌며 카운터로 향한다. 계산을 마치고 호프집 계단을 내려오는 길에 왈칵 눈물을 쏟았다. 그녀는 그렇게 미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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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작가

from 글쓰기 2015. 10. 29. 12:41

발터벤야민 선집, 일방통행로 사유이미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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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5. 노래 한 곡을 써보라.

from 글쓰기 2015. 10. 27. 01:00


당신은 차가운 분홍 같은 사람

, , 입의 경계가 문드러지고

하나의 덩어리로 남았다

멀리서 아득히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고

잠에서 깨어난 나는 당신을 위한 문장을 만든다

흰 달이 뜬다니 조심해서 걸어야겠어

나는 오늘도 오지 않을 너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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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쓰기 봉사활동을 하면서 내 일생에서 기억에 남는 밥상을 주제로 글을 쓴 적이 있다. 당시 내가 쓴 글은 내가 교복을 입던 시절, 우리 집 밥상머리에서 욕지거리가 오가던 시절에 대한 내용이었다. 기억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당시 상황을 글로 옮겨보자면 이렇다. 내가 중학생일 때, 아버지의 주식 투자 실패로 가세가 기울어 아파트를 팔고 월세가 저렴한 공동주택으로 이사를 갔다. 당시 부모님이 운영하던 가게와 채 삼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는 공동주택이었다. 다섯명이 살기에는 너무나 좁았던 그 집에서 나는 아버지의 무수한 욕지거리를 들어야만 했다. 아버지가 기분이 좋지 않았던 어느날 아침이었나 보다. 어머니는 밥상을 차려놓고 나와 여동생, 아버지는 아침을 먹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아버지는 화를 냈고, 쌍시옷이 들어가는 말이 떠다녔다. 여동생은 밥숟가락을 상 위에 올려놓고 자리를 피했고 나는 그 와중에도 꾸역꾸역 밥을 먹고 가방을 챙겨 학교로 향했다. 아버지는 누군가를 향해 두루마리 휴지를 집어던졌다. 무거운 물건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가족 중 누구도 한 번 성이 난 아버지를 말릴 수 없었다. 어머니는 무얼 하고 있었을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모래가 된 밥을 우물거리며 지옥 같은 이곳에서 벗어나고 말겠다는 다짐을 했다. 아버지가 했던 욕은 악마같은 년, 악랄한 년, 너희들은 저주를 받을거라는 내용이 주된 내용이었다. 나는 성인이 되어 이 집을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상상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당시 아버지는 영업을 하고 사람을 상대하며 받는 스트레스를 가족에게 풀었던 것 같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아버지를 용서했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가 밉지도, 가엾지도 않다. 하지만 왜 꼭 밥상머리에서 가족들을 향해 이유 없는 욕을 퍼부었는지는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저 압도적인 무언가가 아버지를 눌러서 화가 삐져나온 것이리라 짐작할 뿐이다. 한동안 밥을 빨리 먹었던 적이 있는데, 이 무렵부터 생긴 버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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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사무실을 빠져나오자마자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았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조차 아까워하는 듯이 보였다. 한쪽 귀가 들리지 않는 그는 이어폰의 볼륨을 높인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는 순간 침묵이 사라졌다. “잘 가” “내일 봐요인사를 나누고 나는 다른 방향으로 가는 척 하다가 돌아서서 조용히 그의 뒤를 밟는다. 발걸음이 경쾌하다. 그는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기를 기다렸다가 횡단보도를 건너 빠른 속도로 왼쪽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그가 뒤를 돌아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을 졸이며 나 역시 조금씩 보폭을 늘인다. 그가 편의점에 들어섰다. 편의점 근처 건물 앞에서 나는 휴대폰을 보는 척하며 그의 행동을 주시한다. 그의 손에 캔 맥주가 하나 들려있다. 편의점 문을 나서자마자 손에 든 맥주 캔을 딴다. 흘러넘치는 거품을 재빨리 입으로 핥은 뒤 다시 빠른 보폭으로 걷는다. 맥주를 마시며 조금씩 걷는 속도가 느려졌다. 나는 수사망을 좁히는 형사처럼 조금씩 그의 곁으로 다가간다. 그렇게 오 분쯤 걸었을까, 버스 정류장이 보였다. 정류장에 멈춰선 그는 남은 맥주를 모조리 들이킨 뒤 캔을 찌그러뜨린 후 주위를 살피더니 정류장 의자에 올려놓는다. 나는 잠깐의 망설임을 눈치 챘다. 그는 회사에서도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나 역시 휴대폰을 꺼내 음악을 듣는다. Radiohead'Down is the new up'이 흘러나온다. 그가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고개를 숙이며 무엇인가를 살핀다. 나는 그를 놓칠세라 버스 정류장 칸막이 뒤에 숨어 빈틈으로 그의 행동을 엿본다. 그는 7로 시작하는 초록 버스를 탔다. 단말기에 교통카드를 찍고 그를 지나쳐 제일 뒷좌석에 앉아 고개를 숙이며 그를 관찰한다. 그는 계속 휴대폰을 만지작거린다. 사람들의 머리 사이로 언뜻 보이는 알록달록한 액정화면으로 게임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버스가 덜컹거릴때마다 그의 야윈 어깨도 들썩거렸다. 그가 내릴 정류장을 모르는 나는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버스는 사람들로 붐볐고, 그의 모습을 쫓기가 힘들어졌다. 순간, 그가 일어나 벨을 눌렀다. 나는 뒷좌석에서 일어나 사람들을 헤치며 그가 버스에서 내린 다음 그를 따라 내렸다. 거리는 어두워져있었고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오갔다. 그의 보폭은 다시 빨라졌다. 정류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공터가 있었다. 가방을 뒤적이며 담배를 꺼내 문 그는 오른손으로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였다. 숨을 쉬고 뱉을 때마다 연기가 피어올랐다. 공터에는 그 말고도 붉은 기운이 도는 머릿결을 지닌 여성과 양복을 입은 사내 둘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암묵적으로 정해진 흡연 구역으로 보인다. 그는 짧게 담배를 피운 뒤 꽁초를 바닥에 던졌다. 잠시 주위를 살피더니 정류장과 고가도로 사이에 난 길로 들어섰다. 발걸음은 여전히 경쾌했다. 귀에는 여전히 이어폰이 꽂혀 있었다. 그가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지 모르는 나는 당신이 듣는 음악이 궁금하다. 편의점을 지나 동네 작은 헤어숍과 복권 가게, 부대찌개 전문점을 지나 한참을 걸은 후에 그가 사라졌다. 버스 정류장과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냉면집으로 들어섰다. 그의 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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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지게 하는 사람, 얼마 남지 않은 통장의 잔고, 깊이 패여 가는 부모님의 주름살, 퇴사를 권유하는 상사의 목소리, 白紙

 

-나를 사랑에 빠지게 하는 사람

지인들 말로는 내가 금사빠라고 한다. 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나는 동의할 수 없지만 주변에서는 그렇다고 한다. 내가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다. 자기 세계가 뚜렷하고 글을 잘 쓰는 사람. 두 번째 남자친구가 그랬고, 현재 내 짝사랑 상대가 그렇다. 사랑에 빠지게 하는 사람이 왜 나를 곤란하게 만드느냐 하면, 일단 일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든다. 멀티태스킹과 거리가 먼 나는 한 번에 한 가지 생각만을 깊게 하는 사람이다. 사랑에 빠지면 일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가장 최근에 다닌 직장을 그만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서 일에 집중을 하지 못한 탓도 크다.

 

-얼마 남지 않은 통장의 잔고

철새처럼 직장을 옮겨다니다보니 통장에 잔고가 넉넉할 리 없다. 씀씀이가 크지 않은 편이라 돈을 버는 일에도 소홀한 듯하다. 친구들의 경조사가 다가올 때마다 불안해진다. 크지 않은 씀씀이는 어쩌면 버는 돈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내가 설사 전업 작가가 된다 해도 통장의 잔고는 여유가 없는 날이 많을 테다. 회사에 입고 갈 옷이 없어 동생과 쇼핑을 하며 돈을 많이 썼던 날이 있다. 책을 좀처럼 읽지 않는 동생이 상당히 문학적인 표현을 썼다. “언니 통장이 놀랐겠네.” “?” “돈을 갑자기 너무 많이 써서.”

 

-깊이 패여 가는 부모님의 주름살

엄마는 1961년생, 아버지는 1955년생이다. 환갑을 넘긴 아버지는 눈매의 살이 쳐져 눈을 덮어 우는 상이 되었다. 엄마는 눈을 치켜뜰 때마다 이마에 주름이 패인다. 이렇게 시간은 흐른다. 부모님이 늙어가는 것도 두렵지만 내가 의지할 곳이 사라진다는 것도 두렵다. 나는 아직도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부모님으로부터 독립을 하지 못했나보다. 어느날 갑자기 교통사고가 나서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날을 상상한다. 여동생과 남동생은 능력이 있으니 그런대로 잘 살겠지만 나는 집도 없이 혼자 버려져서 사회복지사의 도움을 받아 근근히 명을 이어가겠지.

 

-퇴사를 권유하는 상사의 목소리

올해만 들어 직장을 세 군데나 다녔다. 지금은 무직상태. 자진 퇴사한 곳은 한 군데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권고사직이다. 그나마 그 한 곳도 반 강제로 그만둔 곳이나 다름없다. 일을 하지 않고 오랫동안 쉬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절반은 내 병 때문이기도 하다. 상사의 말을 못 알아들었다. 들어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지나치게 긴장하면 머릿속이 하얘지는데, 이런 증상이 계속되다보니 정상적으로 근무하기가 힘들어졌다. 한 군데에서는 카카오톡 메세지로 퇴사를 통보했고, 가장 최근에 다닌 직장에서는 상사와의 면담을 통해 해고를 통보받았다. 인생에서 실패의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나지만 역시 씁쓸한 일이다.

 

-백지

이건 사실 부끄러운 고백인데, 언제부터인가 백지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부터다. 내 글은 솔직하지만 세련되지 못하다. 좋은 문장은 어떻게 태어나는 걸까. 다독과 다상량. 나는 이 두 가지가 부족하다. 백지에 대한 공포를 없애기 위해 글쓰기 좋은 질문 642’라는 책에 나온 주제로 무언가를 쓰고 있는 중이다. 쓰다 보면 나아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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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diohead‘videotape’을 듣고.

 

멀지 않은 과거에 비디오테이프라는 게 있었다. 주로 영화를 볼 때 비디오 플레이어에 이 물건을 집어넣어 재생시켰고, 비디오 플레이어에 녹화 기능이 있어 내가 원하는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녹화도 할 수 있었다. 인터넷을 통해 검색해보니 가정용 비디오테이프의 크기는 가로 18.7cm, 세로 10.3cm, 높이 2.5cm이다. 예나 지금이나 금지된 것을 욕망하는 마음이 앞선 십대들은 누구나 한번쯤 부모님 몰래 야한 비디오테이프를 빌려서 보다가 테이프 부분이 플레이어에 씹혀서곤란했던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내 여동생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 생각하면 왜 미성년자 관람불가인지 궁금한 영화 타이타닉을 부모님 몰래 보다가 테이프가 플레이어에 걸린 것. 나는 이 일로 몇 차례나 동생을 놀렸던 기억이 난다.


스마트폰이 보편화된 지금이야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영상을 볼 수 있지만 90년대 초반에는 영상을 볼 수 있는 매체가 TV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다. 원하는 영상을 보려고 하면 녹화를 떠 둔 비디오테이프를 플레이어에 재생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돌잔치, 입학식, 졸업식과 같은 행사 날에는 8mm 홈비디오 캠코더로 영상을 찍어 비디오테이프로 간직했다. , 그리고 갑자기 생각난 추억 하나 더. 음악 순위 프로그램을 보다가 좋아하는 가수가 TV에 나오면 재빨리 쓰지 않는 비디오테이프를 플레이어에 삽입한 뒤 녹화 버튼을 누르던 게 생각난다. 그런 식으로 한 가수가 부르는 노래를 계속 녹화해 한 시간짜리 긴 영상으로 볼 수 있었다. 내가 중학생 때 통학하던 버스에서는 중앙에 TV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아이돌 가수의 팬들이 각자 좋아하는 가수의 모습이 녹화된 비디오테이프를 가져와서 서로 자기 것을 틀어달라고 경쟁하곤 했다.


그랬던 비디오테이프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아마도 인터넷이 대중화된 무렵부터인 듯하다. 집에 있던 비디오 플레이어는 부모님이 이사를 하면서 버린 것 같고, 내 유치원 시절이 찍힌 비디오테이프도 보이질 않는다. 풀지 않은 이삿짐 어딘가에 쑤셔 박혀 있을테지만 유년기의 추억이 통째로 날아간 기분이다. 포스트잇처럼 쉽게 찍고 쉽게 지울 수 있는 지금의 영상들도 분명 장점이 있지만, 한 번 찍으면 테이프가 늘어져 닳을 때까지 돌려보던 비디오테이프에 대한 추억이 사라져가는 것 같아 아쉽다. 요즘은 비디오테이프에 녹화된 영상을 디지털 파일로 변환해 보내주는 서비스도 있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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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 대한 책을 찾아보던 중 우연히 이 책을 접하고 단숨에 읽어보았다.


+정치인 유시민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된 건 김혜리가 만난 사람이라는 인터뷰를 통해서였다.


+네이버에 유시민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자동완성어로 항소이유서가 뜬다. 이는 유시민이 서울대 프락치 사건으로 1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이에 불복해 제출한 글이다. 유시민은 호소력 짙은 논리적인 이 글로 큰 인기를 끌었다.

 

글을 잘 쓰려면 왜 쓰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글쓰기는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는 행위다. 내면이 거칠고 황폐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없다. 글을 써서 인정받고 존중받고 존경받고 싶다면 그에 어울리는 내면을 가져야 한다. 그런 내면을 가지려면 그에 맞게 살아야 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게 읽은 구절이다. 최근 들어 백지만 보면 두려움을 느끼던 나는, 내가 왜 좋은 글을 쓰지 못하는지 어렴풋이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기술만으로는 훌륭한 글을 쓰지 못한다. 글 쓰는 방법을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내면에 표현할 가치가 있는 생각과 감정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훌륭한 생각을 하고 사람다운 감정을 느끼면서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그런 삶과 어울리는 글을 쓸 수 있게 된다. 무엇이 내게 이로운지 생각하기에 앞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 고민해야 한다. 때로는 불이익을 감수하고서라도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원칙에 따라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기술만으로 쓴 글은 누구의 마음에도 안착하지 못한 채 허공을 떠돌다 사라질 뿐이다.”

백번 옳은 말이다. 자신만의 감정과 생각이 없는 글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 어려운 법이다. 글쓰기에 앞서 나만의 감정과 생각을 다루는 법을 살펴야겠다. 


 # 유시민의 추천도서

  라인홀드 니버,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문예출판사
  레이첼 카슨, <침묵의 봄>, 에코리브르
  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김영사
​  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을유문화사
  리처드 파이만 강의, 풀 데이비스 서문, <파이만의 여섯 가지 물리 이야기>, 승산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김영사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다락원
​  소스타인 베블런, <유한계급론>, 우물이있는집
  스티븐 핑커외 지음, 존 브록만 엮음, <마음의 과학>, 와이즈베리
  슈테판 츠바이크,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바오
  신영복, <강의>, 돌베게
  아널드 토인비, <역사의 연구>, 동서문화사
  앨빈 토플러, <권력의 이동>, 한국경제신문
  에드워드 카, <역사란 무엇인가>, 까치글방
  에른스트 슈마허, <작은 것이 아름답다>, 문예출판사
  에리히 프롬,<소유냐 삶이냐>,흥신문화사
  장 지글러,<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갈라파고스
  장하준,<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부키
  재레드 다이아몬드, <총,균,쇠>, 문화사상
  정재승,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 어크로스
  제임스 러브록, <가이야>, 갈라파고스
  존 스트어트 밀, <자유론>, 책세상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불확실성의 시대>, 흥신문화사
  진중권, <미학 오디세이>, 휴머니스트
  최재천,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효형출판
  카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켈스, <공산당선언>, 책세상
  칼 세이건, <코스모스>, 사이언스북스
  케이트 밀렛, <성性 정치학>, 이후
  토머스 모어,<유토피어>, 서해문집
  한나 아렌트, <예류살렘의 아이히만>,한길사​
  헨리 데이비스 소로우, <시민의 불복종>, 은행나무
  헨리 조지, <진보와 빈곤>, 비봉출판사
# 추천 다이제스트 책
  가마타 히로키, <세계를 움직인 과학의 고전들>, 부키
  강신주,<철학이 필요한 시간>,사계절
  강유원,<역사 고전 강의>, 라티오
  강정인 외, <고전의 향연>, 한겨레 출판
  다케우치 미노루 외, <절대지식 중국고전>, 이다미디어
  사사시 다케시 외, <절대지식 세계고전>, 이다미디어
  유시민, <국가란 무엇인가>, 돌베개
  함영대,<논리적 글쓰기를 위한 인문 고전 100>, 팬덤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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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from 글쓰기 2015. 6. 16. 23:09



사진은 내가 즐겨 찾는 우리 동네 도서관. 인터넷이 지금처럼 보편화되지 않던 시절, 숙제를 하기 위해 도서관에 들러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뒤적이던 기억이 난다. 숙제가 끝나면 함께 도서관을 찾은 친구나 동생과 지하 매점에 들러 컵라면을 홀짝였다. 식사 후에는 다시 자료실로 올라와 서가에 꽂힌 서명들을 훑은 뒤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 읽었다. 키에 비해 높은 책상 위에 책을 올려놓고 불편한 자세로 독서를 하다보면 집중력이 떨어져 오래 앉아 있지 못했다. 그럴 때면 꼿꼿이 앉아 두꺼운 책을 읽는 옆 사람을 곁눈질로 구경하며 감탄하던 기억이 난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사설 독서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사방이 막힌 책상 위는 공부하며 몽상하기 딱 좋은 공간이었다. 집에는 어머니가 사준 책이 많았고, 숙제는 인터넷으로 해결할 수 있었기에 공공도서관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대학을 그만두고 반수를 준비하면서부터 공공 도서관을 찾았다. 수능 공부는 뒷전에 두고 폴 오스터, 김영하, 애거서 크리스티의 책을 빌려 사설 독서실에서 열심히 읽었다.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는 교내 도서관을 이용했다. 공공도서관에 비해 쾌적한 환경과 깨끗한 장서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2006년부터 3년 동안 모교 도서관에서 근로 장학생으로 일하며 돈을 벌었다. 사서 직원이 도서관에 들여올 책들을 선택하고 주문하여 신간 도서가 입고되면, 장서에 도장을 찍고 도난방지 마그네틱을 심은 뒤 바코드가 적힌 스티커를 붙여 청구기호별로 분류하는 일이 내 담당이었다. 이 일의 가장 큰 장점은 누구보다 빨리 신간도서를 접할 수 있다는 것. 또한 CDTAPE를 제외한 별책부록들을 가질 수 있어서 좋았다.

졸업 후 짧은 사회생활을 마치고부터 남는 시간을 주체할 수 없게 되자 다시 공공도서관을 찾기 시작했다. 정독보다는 발췌독을 통해 얕고 넓은 호기심을 채웠다. 심리학과 철학 관련 도서를 찾아 읽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내게 도움이 되는 문장이 나오면 수첩에 옮겨 적어 두었다. (독서 일기를 쓰지 않은 건 후회가 된다.)

몸이 아프고 난독증이 찾아오면서부터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는 대신 오디오북과 팟캐스트를 이용했다. 주로 소설가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이동진의 빨간책방을 들었다.

재취업을 앞둔 요즘은 다시 공공도서관에 들러 토익 공부를 한다. 조용한 열람실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면 치열한 열기가 느껴진다. 메르스로 에어컨 가동이 중단된 오늘도 열람실은 만석이다.

주부가 장을 보러 마트에 들르듯 나는 도서관에 간다. 엄마는 날보고 책 속에 길이 있다고 말한 게 누구냐며 핀잔을 주지만 그래도 나는 도서관을 찾는다. 젊은 날, 갈팡질팡하느라 시간을 허비하면서도 꾸준히 도서관에 들락거린 걸 보면 애초에 사서를 목표로 삼고 열심히 공부나 할 걸. 한때 내 꿈은 공공도서관과 가까운 곳에 집을 구해 사는 것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쉽고도 무척이나 어려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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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국수

from 글쓰기 2015. 6. 14. 21:56

여동생 생일을 앞두고 아빠와 나, 그리고 여동생 셋이 쌀국수를 먹고 왔다. 쌀국수는 베트남과 태국 두 나라에서 즐겨 먹는 음식이라고 한다. 베트남 쌀국수와 태국의 쌀국수의 차이는 육수에 있다. 베트남 쌀국수보다 태국 쌀국수가 양념이 강하다. 오늘 내가 먹은 건 양지와 차돌 부위의 고기가 들어간 베트남 쌀국수였다

식당에서 쌀국수를 주문하니 생숙주와 절인 양파, 단무지, 레몬, 얇게 썬 고추가 곁들여 나왔다. 숙주와 양파를 한 움큼 넣고 휘저어 숨을 죽인 뒤 레몬을 국수 위에 뿌려 먹었다. 종지에 칠리소스와 해선장을 붓고, 고기와 양파를 찍어 먹으니 새콤달콤한 맛이 느껴졌다. 칠리소스와 해선장을 3:1의 비율로 섞어 고기를 찍어 먹으면 더욱 맛있다고 한다.

말없이 국수만 후루룩 잡수시는 아버지에게 맛이 괜찮으냐고 여쭈어보니, “한 번은 먹을 만한 맛이네하고 짧은 평을 내리셨다. 육수가 진해 연갈색 국물이 짜게 느껴졌지만, 풍미가 독특한 이름 모를 노란 빛깔의 차를 마시니 갈증이 풀어졌다.

비 오는 날이면 꼭 포(pho)를 먹는다는 유학생 친구가 떠올랐다. 나도 추진 날에는 라면보다 열량 걱정 없는 담백한 쌀국수 한 그릇이 먼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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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from 글쓰기 2015. 3. 5. 17:49

우울증에 걸렸다. 하루 종일 방 안에서 뒹굴고 먹고 자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취업이 안 돼 무기력해 진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꾸만 이상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갑자기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어쩌나’, ‘오늘 산책을 하다가 교통사고가 나면 어떡하지?’, ‘여동생이 해외여행을 떠나는데 비행기가 추락하면?’ 상태가 나아지면 지나치게 부정적인 생각들이었다는 걸 알 수 있지만, 막상 당시에는 겁에 질려 방바닥에 누운 채 모두가 죽어버리면 어쩌나 하며 몸을 떨곤 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다 보면,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아무 고통 없이 내가 죽어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게다가 왜 이리 움직이기가 싫은지 샤워를 하려면 큰 결심을 하고 방문을 나서야 했다. 깨어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방에서 지내다보니 내 행동반경은 채 5m도 넘지 않았다. 살이 급속도로 찌기 시작했다. 50kg 중반을 유지하던 내 몸무게는 어느새 70kg 가까이 늘어 있었다. 살이 찌니 사람들과의 만남을 피하고, 활동량이 줄어 다시 살이 찌는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제일 무서운 건 기억력 감퇴였다. 책을 읽는데 독해가 되지 않았다. 이미 읽은 구절을 몇 번이나 다시 읽어야 겨우 이해가 될 정도였다. 이런 식으로 책을 한 두 페이지 읽고 나면 기력이 떨어져 잠이 쏟아진다. 가장 즐기는 취미인 독서마저 할 수 없게 되자 일상은 더욱 무료해졌다. 머리가 무겁고 둔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한 마디로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신경정신과를 찾아가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었다. 우울증에 좋다는 운동을 하고 싶어도 날씨가 추워 (실은 몸을 꼼짝하기도 싫어서) 대문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쓴다. 글쓰기에는 놀라운 힘이 숨어있다. 국내 한 신경정신과 전문의는 어떤 글을 읽고 나서 마음의 고통을 잠재우거나 우울한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다면 열 알의 발륨(valium)이나 백 알의 프로작(prozac)보다 훨씬 낫다고 말했다. 같은 맥락에서 일기쓰기는 아주 원시적인 형태의 치유적 글쓰기 중 하나라고 한다. 자신의 일상적 경험과 감정, 욕망, 기억을 표출하기 때문에 내적인 성장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의욕을 상실했다고 느낄 때에는 빈 종이를 꺼내 무엇이든 적어 나가자. 소설이든 일기든 수필이든 상관없다. 그저 묵묵히 글자를 적어 나가다 보면 마음에 있는 응어리가 풀리고 자신과 대화를 하며 자기를 수용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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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일

from 글쓰기 2015. 2. 5. 19:25




출판사 편집자 모집 공고를 보고 무작정 자기소개서를 제출했다. 어리석게도 원서를 내고 난 뒤에서야 편집자의 일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한권의 책이 나오기까지 호흡을 같이 한다는 것 말고는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빌려본 책이 편집자란 무엇인가. 제목 그대로 편집자의 모든 일을 다룬 책이다.


대부분의 전문직이 그러하겠지만 특히 편집자는 장인(匠人) 정신이 요구되는 직업 중 하나다. 출판 여부를 가늠하기 위해 수많은 원고를 읽어야함은 물론이고, 출판이 결정된 순간부터 손익을 예측하고, 책의 구성을 책임지며, 책이 출간된 이후에는 홍보에 주력하며 독자와 소통해야 한다. 단지 책을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선택하기에는 버거운 직업이다. 작가와 달리 책 밖으로 쉽게 드러나는 직업도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힘든 과정을 거치며 탄생한 책을 보면 느낄 뿌듯함은 산고를 치른 여인이 아이를 보는 기쁨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물며 그 책이 독자의 큰 사랑을 받았을 때의 기분이란...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저자가 국내 편집자 55명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 결과다. 뛰어난 편집자가 되려면 어떤 자질이 필요하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왕성한 지적 호기심이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편집자의 전문적인 능력으로는 첫째가 원고를 정확히 파악하는 능력이었으며, 둘째로는 문장력이었다. 편집자의 필요 덕목으로는 강인한 체력이라는 결과도 나와 눈길을 끌었다.


나는 세심함이 편집자에게 필요한 자질이라고 생각한다. 교정이나 교열을 볼 때에도 물론이거니와 저자, 편집장, 발행인, 디자이너, 독자와 끊임없이 교류하려면 대인관계에서의 세심함 역시 필요조건일 것이다.


저자가 뒷부분에서 출판의 미래에 대해 제언한 내용도 흥미롭다. 검색 엔진이 차례나 각주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어도 편집자의 역할은 대신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양질의 콘텐츠를 선별하기 위해 콘텐츠를 재편집하는 편집자의 역할은 새롭게 요구될 것이라고 한다. 온라인 환경에서 양질의 저자를 선별하는 법, 창작과 편집 그리고 독서의 과정을 어떻게 디지털 환경에서 공유하고 확장할 것인지에 대한 물음 역시 충분히 생각해볼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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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트 오브 킬링

from 글쓰기 2015. 1. 26. 12:31

이 영화를 본 심경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영화 ‘액트 오브 킬랑’은 1965년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난 대학살에 참여한 당사자들을 모아 그들이 영화를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이다.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은 특별한 방식으로 인도네시아의 부조리한 상황을 꼬집었다. 학살자들은 카메라 앞에서 자신들이 실제로 저지른 끔찍한 살인과 고문장면을 태연히 재연한다. 심지어 주인공 ‘안와르 콩고’는 둔기로 사람을 죽이면 피비린내가 난다는 이유로 철사를 사람의 목에 감아 천 명을 살인했던 과거를 재연한 뒤 웃고 춤을 춘다. 반면에 그는 손자가 새끼 오리의 다리를 다치게 하자 이를 타이르는 평범한 노인이기도 하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절대악보다 더 악한 것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생각하지 않고 저지르는 행동이다.


1965년 인도네시아 군은 100만 명이 넘는 이들을 반공분자로 몰아 살해했으며, 피해자는 250만 명이 넘는다. 더욱 끔찍한 사실은 군부 정권이 ‘판차실라 청년회’를 앞세워 아직도 정권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판차실라 청년회는 인도네시아의 부통령이 공식 행사에 참여해 연설을 할 정도로 큰 조직이다. 이들은 국가의 발전에 이바지한다는 대외 명분과는 달리 실제로는 시장을 돌며 중국 상인들에게 돈을 빼앗고 불법 도박과 밀수를 서슴지 않는 조직이다.


대학살의 주범인 안와르 콩고는 자신이 만든 영화를 본 뒤 바지나 머리카락의 색을 바꿔야겠다는 말을 하면서 불편한 심기를 우회적으로 내비친다. 마지막 장면에서 안와르가 철사와 자루를 집어 들고 살인 방법을 설명한 뒤 구역질을 하는 장면에서는 인간에 대한 희망을 느꼈지만, 이들이 만든 영화에서 철사를 목에 감은 피해자가 성직자 옷차림을 한 안와르에게 “천국에 갈 기회를 주어서 감사하다”며 금메달을 목에 걸어주는 어이없는 연출을 보고 실소가 터져 나왔다.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은 미국이 인도네시아 학살에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는 그가 영화를 만들게 된 동기 중 하나라고도 말한다. ‘액트 오브 킬링’은 비단 인도네시아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이 영화를 인도네시아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영화로 봐달라고 했다. 영화를 보면서 한국의 과거가 떠오르는 것은 나 뿐만이 아닐 것이다.


액트 오브 킬링은 인도네시아에서 천 번이나 상영되었다. 이로 인해 대학살이 공론화되고 피해자들은 극심한 공포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엔딩 크레딧에 Anonymous라는 자막이 수없이 올라가는 걸 보면 아직 인도네시아가 헤쳐나가야 할 길은 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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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글쓰기 2015. 1. 2. 22:13

나는 집으로 돌아와 짧고 깊은 잠을 청했다. 어제도 윗집의 발자국 소리 때문에 밤잠을 설친 탓이다. 잠에서 깨어나 휴대폰 액정을 바라보았다. 어제 인터넷으로 알아본 원룸 입주자가 집을 보러 오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모교와 적당히 가깝고 월세도 저렴하거니와 바로 맞은편에 경찰서가 있어 점찍어둔 집이다. 급한 마음에 끼니도 거른 채 원룸으로 향했다.

우편함에서 방주인이 보관해둔 열쇠를 꺼냈다. 매물로 나온 집은 인터넷을 통해 보던 이미지와 달랐다. 건물 입구를 열쇠로 열고 들어가자마자 회색 시멘트 계단과 복도를 둘러싼 회청색 벽이 보였다. 90년대 유행하던 여관을 개조해 만든 원룸이었다. 문을 열고 방문을 들여다보니 감옥이나 다름없어보였다. 방 크기는 245mm인 내 발을 기준으로 가로 열 걸음, 세로 일곱 걸음 가량이다. 현관 오른쪽에는 성인 여자 한 명이 겨우 샤워를 할 정도로 비좁은 화장실이 보였다. 세탁기나 싱크대는 없었다. 한기가 느껴졌다. 이곳에 살던 남자에게 전화를 걸어 식사와 빨래를 어떻게 해결했냐고 물었다. 저는 그냥 잠만 자고, 손빨래는 화장실에서 해결했는데요. 건물 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세탁은 어떻게 하는지 묻자, 그 방은 원래 세탁기가 들어갈 수 없는 방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럼 어떻게 하나요. 옥상에 있는 물탱크를 잘라 동파가 되지 않게 세탁기를 설치해줄게. 세탁기는 입주자 본인이 가져와요. 세탁기 사오면 수도비 지원해주실 수 있나요? 세탁기 많이 안 돌리면 몇 천원 빼줄 수 있고. 네? 지원해주신다는 말씀인가요? 아니, 한 달에 두세 번 돌리는 건 괜찮은데, 너무 많이 돌리면 안 되는 거고. 아. 그럼 세탁기 돌릴 때 들어가는 수도세 지원해주시는거에요? 글쎄 내가 거기 옥상에 물탱크 안쪽에다가 세탁기 설치해준다니까. 벽을 보고 이야기하는 기분이었다. 싱크대는 없나요? 그 방은 원래 없어. 대신 학생한테 인덕션 하나 줄게. 그럼 전기세 많이 나오잖아요. 버너는 안 되나요? 원래 안 되는데, 사고 안 나게 고급형 사오면 허락해줄게. 감사합니다. 그리고 세탁기는 설치 할 수 있는지 없는지 내가 알아보고 연락을 줄게요.

통화를 마친 나는 일어나 방에 한 가운데에 섰다. 사방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시멘트 바닥과 벽에서 느껴지는 한기다.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거대한 여관 건물이 시야를 가려 하늘을 보기 힘들었다. 고개를 숙이니 비좁은 골목에 일렬로 놓인 쓰레기통과 폐지 더미가 보였다. 새벽에만 조금 시끄럽다는 세입자의 말이 떠올랐다. 스마트폰으로 나침반 어플리케이션을 실행해보니 북향이다. 이곳에서 지내려면 화장실을 부엌처럼 쓰고, 버너 폭발 위험을 감수하고 식사를 하면서 냉기를 견뎌야 한다. 방에 짐이 다 들어가지 못할 텐데. 빨래를 못 할 수도 있다.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곳에 오래 지내면 정신 건강에 해롭다던데. 내가 견딜 수 있을까. 그래도 벽간 소음이 없으니 살 만하지 않겠나. 책 하나는 잘 읽히겠네. 경찰서도 가까우니 치안은 확실하고. 스스로 타협을 하는데 철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웃집 여자가 구두를 또각거리며 시멘트 복도를 걸은 뒤 내가 있는 방 앞으로 난 공용 계단을 걸어 내려가는 소리였다. 이 방은 복도 끝 계단 통로 바로 앞에 위치해있어 사람들의 발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갑자기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곳에서 지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당이 있고 햇빛이 잘 들어오는 남향 단독 주택. 햇빛 쨍쨍한 날에는 창문을 열고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이불을 빨아 옥상에 널 수 있는 곳. 가을이면 돗자리에 붉은 고추를 늘어놓고 말릴 수 있는 곳. 그런 곳이면 책도 잘 읽히고 적당히 들리는 사람 말소리에도 예민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다음날 집 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계약이 어렵겠다는 말을 전했다. 통화를 마친 나는 한참이나 스스로의 무능을 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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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from 글쓰기 2014. 12. 28. 02:39

책 좋아한다는 소리를 듣고 자란 내가 언제부터 글쓰기를 부담스러워했을까. 성인이 된 후 독서량이 급격히 줄은 탓도 있지만 제일가는 이유는 자기검열이라고 할 수 있겠다. 대부분의 글에는 글쓴이의 생각이나 가치관이 반영될 수밖에 없는데, 내 글은 심지어 일기마저 암울하기 짝이 없었다. 어두운 나를 남들에게 드러내기 싫었다. 백지를 보면 불행한 기억이 먼저 떠올랐다. 하지만 내 느낌을 표현하는 글짓기는 꽤나 매력적이었다. 학부생 때 독서 감상문 따위를 제출하며 쾌감 비슷한 걸 느꼈다. 내 감정을 다듬어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것. 내 안에 몽글거리는 무언가를 밖으로 빼내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글을 쓰고 나면 잠시나마 몸과 마음이 가벼워졌다. 대부분의 창작자가 창작물을 만드는 과정이 이와 비슷하리라 생각한다. 깊은 곳에서 잠자던 감정 덩어리들은 밖으로 빠져나와 글로, 음악으로, 혹은 조형물로 표현된다. 창작자는 최초의 덩어리를 어떻게 다듬을지 고민할 것이다. 덩어리를 더하거나 빼거나 때로는 뒤틀어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작품을 만든다. 중요한 건 덩어리의 핵심을 손상시키면 안 된다는 사실. 중요한 부분을 놓쳐서는 안 된다. 예술가의 직관은 언제나 옳다. 내가 글쓰기를 두려워한 두 번째 이유는 내 인식의 필터를 믿지 못해서다.


좋은 글쓰기를 위해 생각의 외연을 넓힐 필요가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글은 작가의 인식을 거치기 때문이다. 다문, 다독, 다상량. 그리고 많은 경험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나는 오늘 무엇을 보고, 어떤 음식을 맛보았으며, 무슨 감정을 느꼈는가. 노트에 오감을 기록해두면 좋은 글감이 되겠다. 글쓰기에 대한 오감을 떠올려본다. 지금 당장 떠오르는 건 연필과 종이가 맞닿는 순간의 서걱한 촉감, 각진 연필을 꽉 쥐고 나면 오른손 중지 왼편에 느껴지던 굳은살, 새 노트나 책장을 넘길 때마다 손가락을 베던 종이날, 오래되어 누렇게 변한 종이 그리고 종이냄새, 원고지의 가지런한 빨간 선, 초등학교 저학년 때 쓴 희곡 정도다.


지금은 (그나마도 짧았던) 회사생활을 접고 재취업을 위해 토익 시험을 준비하며 영어 단어를 외우고 있지만, 작가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다. 다독, 다작만큼 좋은 스승이 없다고들 말한다. 그래서 이곳에 A4용지 한 장 분량의 글을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올리려 한다. A4용지 한 장을 빼곡히 글로 채우기란 의외로 쉬운 일이 아니다. 개중에는 말끔한 글도 있고, 지금처럼 두서없는 글도 있겠다. 중요한 건 어떻게든 계속 쓰겠다는 나 자신과의 약속이다. 다른 일을 하면서도 매일 글을 쓰다보면 지금보다 한결 나은 내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김연수 작가는 그의 산문집 <소설가의 일>에서 “매일 글을 쓴다. 한순간 작가가 된다. 이 두 문장 사이에 신인 즉 새로운 사람이 되는 비밀이 숨어 있다.”고 말했다.


어디선가 작가를 ‘현실에서 실패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라고 정의한 말을 들은 기억이 난다. 기억의 우물을 퍼 올리는 고통스러운 작업을 통해 인간 내면에 감춰진 무언가를 꺼내 보이는 존재들. <젊은 소설가에게 보내는 편지>의 저자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글쓰기를 작가의 삶을 파먹고 사는 촌충에 비유한다. 글쓰기가 삶의 방식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고통스러운 직업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기를 멈출 수 없는 이유는 글쓰기의 기쁨이 더 크기 때문이 아닐까.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이들에게 무한한 존경을 보내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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