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 일본

from 기록 2014. 11. 8. 15:57
(2008년 7월 9​일에 쓴 글)

기말고사가 끝나고 머리도 식힐 겸, 친구에게 일본 드라마를 추천해달라고 졸랐다. 일본 드라마라고 해야 기껏 꽃보다 남자, 노다메 칸타빌레 밖에 모르던 나는, 친구가 건네준 어마어마한 리스트에 놀랐다. 친구는 고쿠센, 사랑 따윈 필요 없어, 워터보이즈, 마이보스 마이히어로, 1리터의 눈물, 체인지, 백야행 등등 10개가 넘는 드라마를 단숨에 종이에 적어 보여줬다.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내가 이 드라마들을 다 보면 또 다른 드라마들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검색창에 '일드'라고만 쳐도 가나다순으로 된 콘텐츠 검색이 저절로 뜬다. 내가 자주 들르는 웹 커뮤니티에서는 일본 뮤지션에 대한 이야기도 심심찮게 올라온다. 화장에 관심이 많은 여동생은 요새 일본 십대들의 화장 스타일인 갸루 화장을 따라하고 태닝을 하느라 야단이다. 한국에서 부는 일본문화의 열기가 거세다.

대부분의 젊은 사람들에게는 일본의 문화가 호감의 대상이 되었지만, 여전히 과거사나 독도 문제가 불거지면 일본을 향한 시선은 날카로워진다. 일본에 대하여 개개인이 아닌, 대다수 한국인들의 종합적인 판단은 부정적이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일본의 전통 문화에 대한 근거 없는 소문이 나돌기도 한다. '기모노와 함께 착용하는 긴 천인 오비는 어디서든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하기 위해 항상 두르고 있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머슴처럼 밥그릇을 들고 밥을 먹는다.'는 속설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오비는 기모노의 특성상 옷을 몸에 맞추어 고정해야 했기 때문에 두르는 것이고, 밥그릇을 들고 밥을 먹는 이유는 옛날 무사들이 상대편이 볼 때 허리를 구부리고 먹는 자신의 모습이 비굴하고 자존심 상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에 대한 이해가 필수다. 
 
그런 점에서 에도시대에 대한 공부는 일본을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일본의 문화(도시락, 스모, 스시, 가부키, 원색의 판화, 오래된 목조건물, 인스턴트 음식)는 대부분 에도시대에 발달하거나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에도시대란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아 막부를 개설한 때부터 1867년, 15대 쇼군 요시노부가 정권을 조정에 반환한 시대를 통칭한다. 이 시대는 무사계급의 최고지위에 있는 쇼군이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고 전국을 통일 지배하는 집권정치 체제가 확립된 시기이다. 정권의 본거지는 에도(지금의 도쿄)였다. 식량공급이 안정되고 상업이 번성하여 문화가 고도로 발달한 때였다. 

두 세 페이지에 걸쳐 수록된 화려한 참고자료 덕분에 책읽기가 수월했다. 저자는 ‘현대 일본 문화의 토대’라는 부제에 걸맞게 지금의 일본 문화가 생긴 원인을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곁들여 설명한다. 음식, 생활, 오락, 사랑, 바쿠후, 의협, 괴담의 일곱 가지 꼭지로 나누어져 있어 독자의 흥미대로 읽어도 지장이 없다. 내 경우 일본의 최초 음식점은 어떻게 생겼는지, 에도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연애했는지, 일본의 유곽 문화는 어땠는지, 어떻게 도시락이 발달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내용이 좋았다. 교과서처럼 연대순으로 기록한 짧은 사건들보다는, 기록에 남겨진 당시 서민들의 삶을 통해 에도시대 문화를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어 좋았다. 

  책을 사자마자 에어컨 하나 없는 자취방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책을 읽었는데,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로 재미나게 읽었다. 특히 1장의 음식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촌언니는 해외여행을 떠나기 전에 그 나라의 주요 음식을 살펴본다고 한다. 같은 아시아권으로 여행을 떠나면 옷이나 집은 비슷한 편이지만, 음식문화만큼은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음식을 공부하다보면 기후나 국민성까지 추측할 수 있다나. 언니가 요리를 전공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섬나라인 일본이 생선요리가 발달한 것을 떠올려보면 수긍이 가는 주장이다.

생선 이야기가 나온 김에 책에 실린 복어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에도 시대에는 지금처럼 복어 독을 완벽하게 분리할 수 없었지만, 상류층 사람들이 기가 막힌 복어의 맛을 보고 싶은 나머지 꾀를 내어 복어 국을 거지에게 슬쩍 건넸다고 한다. 얼마 후 거지가 멀쩡히 살아 있는 것을 보고 나서야 마음 놓고 복어 국을 먹은 뒤 거지에게 맛있냐고 물어보았더니 거지가 모두 다 드셨냐고 반문하며 “그럼 나도 먹어야겠군요.”라고 말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도쿠가와 막부는 다이묘들에게 복어 맛을 보는 걸 금지했는데 그 이유가 대의를 위해 목숨을 던져야 할 무사가 복어 먹다가 죽으면 큰 치욕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고. ‘복어 금지령’은 우연히 복어 맛을 보고 탄복한 이토 히로부미가 폐지할 때까지 계속 되었다고 한다. 생명과 맞바꿀 정도로 복어요리를 사랑한 일본인들의 이야기들을 읽다 보니, 일본인들 중에는 미식가가 많다는 속설이 떠올랐다.

내친김에 장어 이야기도 하나 더. 일본인들은 한 해에 1인당 평균 여섯 마리의 장어를 먹는단다. 일본 사람의 장어 사랑은 정말 혀를 내두를 만하다. 하지만 장어구이를 만드는 기술은 만만치 않았는데... 책의 실린 비유를 옮기자면 장어 요리의 장인이 되기 위해 '소스를 바르는데 3년, 꼬치를 끼는 데 3년, 굽는 데 평생'이 걸린다고. 소스를 바르는데 3년이 걸렸다는 말이 완전히 믿기지는 않지만, 직업 정신만큼은 대단하다는 생각이다. 장어요릿집에서도 일본 특유의 도제식 교육이 이루어졌을거라는 추측이 든다.
일본은 세계 최초로 레스토랑을 연 나라 중 하나다. 에도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세워진 계획도시인데 다이묘과 가신들이 몰려들어와 있어 이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식당이 17세기부터 등장했는데 유럽에서 이런 종류의 식당이 등장한 것은 19세기였다고 한다. 음식 문화에서 서양에 뒤지지 않게 발달했다는 점이 놀라울 따름이다. 이런 근대성들이 메이지 유신을 가능하게 하지 않았을까. 

음식문화 말고도 사랑이라는 주제의 내용들도 재미있다. 직업 여성인 다유와 평범한 양갓집 아낙을 비교한 당시의 글이 재미있다. 직업 여성은 세련되게 표현한 반면, 부인과 같은 여성들에게는 바가지나 긁고 푼수같은 이미지로 비유한 문장이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을 차지하기 위해 자살을 결심하거나 산넘고 물건너 여성의 침실에 몰래 들어가는 ‘요바이’를 하거나, 사랑하는 상대가 동성이라도 크게 개의치 않고 열렬히 구애하는 에도시대의 모습은 지금의 개방적인 일본의 성문화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의 성문화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는데 성문화 또한 한 나라의 문화이므로 우리와 다르다고 무작정 비난하지 말고 개방적인 성 문화가 생기게 된 원인을 찾아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독후감 과제 때문에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었지만, 읽다보니 소장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 책을 구입했다. 교양 수업을 듣다 보면 이런 부류의 책을 많이 읽게 된다. 하지만 다른 나라의 문화를 소개한답시고 출판된 책들은 솔직히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게 다수였다. 저자가 독자들에게 다른 나라의 문화를 소개한다는 취지에 맞지 않게 본인의 지식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엿보였기 때문이다. 

그 중 제일 최악이었던 책을 꼽으라면 주저하지 않고 단연 ‘일본은 없다’를 고를 것이다. 어릴 적 베스트셀러에 올라왔다는 이유만으로 동네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가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한 막연한 편견을 갖게 되었다. 저자는 ‘일본은 나라는 부강하나 국민은 가난한 나라, 노예근성을 가진 국민들, 서양 남자라면 사족을 못쓰는 여자들, 45초마다 살인이 일어나는 나라’로 비유했다. 어처구니 없는 주장이다. 나처럼 일본에 가본 적이 없거나, 비판적으로 독서를 하지 못하는 어린 학생들은 저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밖에 없다. 우리 나라에서는 매년 수많은 일본 관련 책들이 출판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일본은 없다"처럼 비하하는 책도, 그리고 확실한 근거를 갖고 비판하는 책도, 그리고 일본의 긍정적인 면을 부각한 책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에서는 일본을 비판하는 책이 잘 팔리기 마련이다. 비난 보다 비판이 우선시되어야겠지만, 한 나라의 문화에 대해서만큼은 역사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한 비판도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에도일본>이라는 책은 정말 좋은 책이다. 이 서평을 유명 포털, 출판사 웹사이트에 올리면 일빛 출판사 알바냐는 비아냥을 들을 수 있겠지만. 

이 글을 쓰는 다음날이면 계절학기 수업이 모두 끝난다. 이번 계절학기가 끝나면 열심히 아르바이트도 하고 일본어도 공부해서 일본어과 친구와 일본을 여행할 생각이다. 친구를 만나면 왜 일본에서 도시락이 발달했는지, 왜 에도시대부터 동성애가 성행했는지 물어보고 모른다면 내가 대신 답하면서 아는 척 좀 해야겠다. 일본에 가서는 장어요리, 복어요리, 초밥, 라면, 우동을 실컷 먹고 왔으면 좋겠다. 벌써부터 기대 가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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