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16일의 메모

from 기록 2014. 11. 8. 17:16

#1.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여자를 의식하고 나답지 않게 걷다가 도서관 계단에서 넘어졌다. 학생들이 걷는 모양새를 흉내 내서 걷다가 발이 꼬인 거다. 왜 나답게 살고 있지 않나. 솔직하게 나를 드러냈다가 겪었던 불쾌한 경험들이 떠올라서다.

 

#2. 까뮈의 <작가수첩>을 읽고 있다. 내가 고등학생 때, 머릿속의 생각을 비우지 않으면 책을 읽기 어려워 노트에 무언가를 적어둔 기억이 난다. 두 번째 남자친구는 작가 수첩을 쓰고 있었다. 장점부터 단점까지 여러모로 내 십 대 모습과 똑같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다시 만날 수 없다.

 

#3. 잡념이나 다른 사람의 방해로 생각의 흐름이 끊기면 책 읽기가 어려워 짜증이 난다. 칙센트 미하이의 <Flow>를 읽어보자.

 

#4. 무를 말려서 튀긴 덩어리를 칼리타 드리퍼에 담아 뜨거운 물을 붓고 우려내 마시려던 순간이었다. 연갈색 물이 찰랑거리는 투명하고 동그란 드리퍼 바닥 너머로 멀티탭에 어지럽게 꽂힌 콘센트 가닥이 보였다. 내가 바라보는 대상들의 구도가 정물화처럼 똑 떨어져보였다. 마침 따뜻한 수증기 때문에 안경에 김이 서려 시야까지 흐려진 상태다. 이 순간을 사진으로 남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면 내가 보는 대상을 카메라처럼 촬영할 수 있는 장비가 있었으면 좋겠다.

 

#5. 나의 분석과 비판이 외부가 아닌 내부를 향했다가는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의식적으로라도 집중할 거리를 찾아야 한다.

 

#6. 슬라보예 지젝의 말대로 폭력은 도처에 널려있다. 그렇다면 일상의 폭력에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7. 친구가 내게 좋아하는 계절을 물었고, 나는 5월의 새벽을 이야기했다. 고등학교 이 학년 때, 독서실에서 제일 늦게 퇴실하며 별을 보고 집까지 걸어오던 그때의 공기와 온도가 좋았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다.

 

#8. 사랑했던 사람의 비루함을 보았다.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멍을 만드는 사람은 비겁하다. 가엾은 사람

 

#9. 양가감정을 자주 느낀다.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 하며 살다 보니 나조차 스스로의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진심은 행동에서 드러난다는 말이 떠오른다. 내 행동을 역으로 추적해 주된 감정을 파악하는 편이 정확하겠다.

 

#10. 왜 나는 사소한 일, 특히 소음 문제에 집착하나?

 

#11. 철학을 공부하면서 종교에 회의를 느꼈다. 비겁하지만 나는 종교를 선택했다. 나도 살아야 하니까. 알고도 속는 기분이다. 가끔은 내가 선택한 종교 율법에 따르는 삶이 후회된다. 악인을 만나거나 예술을 대할 때다.

 

#12. 종교는 옳고 그름이 아닌, 믿음의 문제다.

 

#13. 모든 사람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 이는 내 행동의 준거가 된다.

 

#14. 봉사활동 오리엔테이션에서 판사와 수녀의 이야기에 사로잡혔다. 그러니까 내게 善이란 공정함일 테다.

 

#15. 종교를 갖고부터 엄마의 인간적인 단점이 고스란히 보였다. 당신은 스스로를 강한 존재라고 말씀하시지만 틀렸다. 엄마는 나약한 사람이다. 그래서 아빠를 떠나지 못하고 내게 감정적으로 기대는 거다. 당장 힘들어도 엄마와 거리를 두어야 모두 행복해질 수 있다.

 

#16.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관심을 버리는 것이다. 예술에 있어서의 어떤 종류의 포기. 다시 쓰기. 어떤 종류의 것이건 일정한 수확을 가져다주는 노력.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나태의 문제. - 58p. 까뮈, <작가수첩>

 

#17. 조용히 책을 읽다가 성가가 울리는 환청을 들었다.

 

#18. 사람이 (내가) 자신의 허영에 양보할 때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하여' 생각하고 살게 될 때마다, 그것은 배반이 된다. 그때마다 남의 눈을 의식하여 행동하는 것은 엄청난 불행이며, 그로 인하여 나의 존재는 진실 앞에서 점점 작아지는 것이었다. 남들에게 자신을 털어놓을 필요는 없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만 그러면 되는 것이다. 남에게 보이기 위하여 자신을 털어놓는 것이 아니라 주기 위하여 그러는 것이니까. 한 인간에게는 훨씬 더 큰 힘이 내재해 있다. 그 힘은 꼭 필요할 때만 나타난다. 궁극에까지 간다는 것은 자신의 비밀을 간직할 줄 안다는 것이다. 나는 고독함 때문에 괴로워했다. 그러나 나는 나의 비밀을 간직했기 때문에 고독함의 괴로움을 극복했다. 그리하여 지금 나는 남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 홀로 살아가는 것보다 더 큰 영광을 알지 못한다. 글을 쓴다는 것, 나의 심오한 기쁨! 세계와 쾌락에게 동의할 것 - 그러나 오로지 헐벗음 속에서만. 내가 나 자신 앞에서 벌거벗고 있을 줄 몰랐다면 해변에서 벌거벗고 지내기를 좋아할 자격을 갖지 못 했을 것이다. - 까뮈, <작가수첩>

 

2014/02/28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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