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저녁, 원룸 이웃(추정)이 대문을 부서지도록 닫은 일을 곱씹느라 새벽 세 시가 넘어서야 잠이 들었다. 사소한 일이지만 그동안 교묘히 내게 행했던 괴롭힘과 보복 소음이 한 번에 떠올라 억울하고 분한 느낌이 들어서다. 층간 소음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과 정보를 살피며 진지하게 소송을 고려하다가 새벽 세 시가 넘어 겨우 잠이 들었다.
아침에 늦게 일어나 오전 미사에 불참했다. 오늘은 교리 수업 대신 4월 세례를 맞아 예비 신자와 대모의 대면식이 열렸다. 나는 대모에게 이웃으로부터 겪은 고충과 소송 이야기를 꺼냈고, 대모는 상대방이 내 반응을 보고 재미를 느껴 계속 괴롭히는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내 모든 상황을 아는 봉사자님은 소송은 본인에게 득이 될 게 없으니 하지 말 것을 거듭 강조하시고.... 교리 수업이 끝나고 모교 앞 제 본집을 찾아갔다. 전날 ebs 공부의 신 동영상을 보고 나도 공부 다이어리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서다. 일요일이라 문을 연 제본집은 한 군데도 없었다.
전철을 타고 디지털미디어시티역으로 이동했다. 스트레스 때문에 얼이 빠진 나는 한 정거장을 지나쳐 내렸다. 오늘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세 편의 영화를 본다. 더 테러 라이브를 보고 잠깐 쉰 다음 러시안 소설을 보았다. 영화를 보면서도 이웃 남학생 생각이 자동적으로 떠올랐고, 어떻게 소송을 진행할지, 소송에 필요한 증거는 어떻게 모을지 생각을 하느라 완벽히 몰입하지 못 했다. 급기야 러시안 소설 상영 후 GV가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극장을 나와 편의점에서 라면을 먹으며 소송 문제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정신을 차리고 상영관으로 뛰어와보니 객석은 텅 비어있다. 한 시간만에 GV가 끝났나 보다. 오래간만에 통하는 정서의 영화였는데. 감독이 어떤 이야기를 했을지 궁금하다. 아쉽다. 허탈한 마음에 한국영상자료원 구석 의자에 앉아 가톨릭 교리서를 펼쳤다. 십계명 중 다섯 번째 계명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을 죽이지 말라.' 소송은 사람을 죽이는 짓과도 같을 테다. 그래서 봉사자님이 소송을 말리는 건가? 갑자기 교리서를 읽기 싫어졌다. 백날 착하게 살아봤자 뭐 하나. 바뀌는 건 없다. 나를 지킬 줄 알아야 한다. 가방에 있는 영화 사전을 읽을까 싶었지만, 전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인지 졸음이 밀려왔다.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숙이고 얕은 잠을 잤다. 어디선가 쾌활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한국영상자료원에 근무하는 40대 남자 직원의 말소리다. 낯익은 인상이라 기억에 남겨두었던 사람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다녔던 모 식품회사 인사팀장과 많이 닮았다. 남자 직원은 여직원들과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이곳에서 일하면 영화도 마음껏 보겠지. 얼마 전 무기 계약직에 지원했는데, 합격했으면 좋겠다.
아이스크림을 먹고 극장으로 돌아와 잠 못 드는 밤을 보았다. 영화를 보면서 첫 번째 남자친구와 만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뛰어난 영화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와 닿는 영화들이 있다.
버스를 타고 전철역으로 가는 길, 소송 문제와 이웃을 생각하느라 나는 또 엉뚱한 곳에서 내려버렸다. 디지털미디어시티 역까지 걸어가며 노래를 불렀다. 어렸을 때 엄마가 자주 부르던 노래가 내 입에서 나와 놀랐다. 엄마가 죽으면 어쩌지?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엄마가 돌아가셔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는데, 오늘은 달랐다. 엄마가 갑자기 돌아가시면 많이 후회할 것 같아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역에서 자취방까지 고개를 떨구고 땅만 보며 걸었다. 생각할 거리가 많아서다. 이웃 때문에 집에 들어가는 발걸음이 무겁다. 거리에는 술에 취한 대학생들, 짧은 치마와 바지를 입은 어린 여학생들이 보인다. 갑자기 내 양 어깨에 가벼운 무게가 느껴졌다. 누군가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니, 술에 취한 남학생이 황급히 휴대폰 액정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내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방금 제 어깨에 팔 올리셨죠?" 이제는 놀랄 것도 없다는 마음에 느긋하게 물었다. 학생은 나를 흘끗 쳐다보며 오른손바닥을 내게 펼쳐 보이고는 좌우로 흔들어댔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나는 "술에 취한 분 같으니 그냥 넘어가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가던 길을 계속 갔다. '왜 남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댑니까? 사과하세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내가 진짜로 사과를 받고 싶은 사람은 이 행인이 아니라 원룸 이웃이라는 생각에 말을 뱉지 못 했다. 술 마신 사람과 싸움이 붙어서 좋을 건 없다. 내 옆에는 나란히 길을 걷던 여자 둘이 있었지만 아무도 내게 벌어진 일에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점점 이곳이 싫어지려 한다. 조금 서럽다. (2014/02/17 00: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