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작 이렇게 좀 살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루하루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에 기쁘다.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은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무기력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학습된다. 마틴 셀리그만은 개를 이용해 다음과 같은 공포실험을 진행했다.
개를 끈에 묶어 상자에 넣은 후 위의 그림과 같이 1), 2), 3)의 환경을 만들었다. 24시간 후 묶어 놓았던 끈을 풀었을 때 전기충격을 중지시킬 수 있었던 1번 개와 전기충격을 받지 않았던 2번 개는 전기가 흐르지 않는 쪽으로 넘어 갔지만 어떤 행동을 해도 전기충격을 멈출 수 없었던 2번 개는 벽을 뛰어 넘지 않았다. 자신이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무기력이 학습된 것이다. 따라서 아이들에게 되도록이면 성공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주고 무기력이 학습되지 않도록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
제작진은 낙관성 테스트를 통해 낙관성이 높은 아이들과 낮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또 다른 실험을 했다. 낙관성이 높은 아이들에게는 여러 차례에 걸쳐 어려운 영어 단어를 제시해 주고 낙관성이 낮은 아이들에게는 계속해서 쉬운 영어 단어들을 제시해 주었다. 회가 거듭될 수록 아이들의 태도는 달라졌다. 낙관성이 높은 아이들도 어려운 영어 단어가 지속적으로 주어지자 다음 문제를 포기하겠다는 학생들이 늘어난 반면 낙관성이 낮은 아이들의 경우 쉬운 문제가 계속 되자 다음 문제에 도전해 보겠다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지금까지의 성공경험이 다음 문제도 맞출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한 것이다.
사람은 예측이 불가능한 사람을 싫어하기 때문에 겉과 속이 다른 것에 대해 민감하죠. 사람은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와 상황을 끊임 없이 자신의 시각으로 정의하고 해석하고 이해하려고 하고 그것이 안될때 혼란스러움과 두려움을 느끼죠.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실은 내가 알고 있던 것과 다르거나 내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내가 모르는 것은 당황스럽고 불안한 일이기 때문에 잘못된 정보와 판단의 오류를 제공하는 '가식'에 대해 경계하는 센서를 갖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사람들한테 잘하지만 거짓의 냄새가 나는, 진실하지 않은 사람보다 까칠하더라도 솔직한 사람이 더 사랑받는 것은 후자가 예측 가능한, 안전한 사람이기 때문일 겁니다. 착하고 좋은 사람으로 믿고 마음 주었다가 그 억눌린 진심의 파괴력에 한번 데이면 데미지가 꽤 크죠. ㅎㅎ 사람들은 그런 위험성을 감지하는 것이 아닐까요?
어제(3월 9일) 남영이과 함께 조성하 교수님을 찾았다. 남영이가 대학원 문제로 면담하고 싶은데, 혼자 가기 민망하다면서 나를 데려간 것이었다. 교수님은 남영이를 보며 ‘넌 공부 잘 했던 것 같은데’ 이런 말씀을 하셨고 남영이는 웃으면서 대학원 가기엔 성적이 낮아요. 호호. 이렇게 웃고. 나는 옆에서 그냥 웃고. 말이 끊기자 이제는 내가 교수님께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아, 교수님. 저는 성적이 너무 낮아서 그런데요 취업을 하려면 영어 성적을 올려야 할까요, 아니면 일단 인턴 같은 자리라도 구해야 하나요? 교수님은 뜸을 들이시더니 답답해하며 말씀하셨다. 너희는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자기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말이지.. 아, 저도 알아요. 그래? 니가 인사 담당자라면 너를 뽑을까? 아니요. 그럼 눈높이를 낮춰야지. 일단 인턴이든 뭐든 뛰어 들어서 경력을 쌓아서 움직일 생각을 해야지. 학교에 취업, 면접 강좌 많으니까 각종 정보들 수집해봐. 이틀이면 웬만한 정보 모을 수 있을 거야. 오히려 지금같은 때가 너같은 아이들에게 기회일 수 있어. 예전같으면 뽑지 않았을 사람들을 국가에서 나서서 뽑으라고 하잖아. (중략) 글쎄, 네 생각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난 그렇게 생각해.
뭐 이정도로 말씀을 하셨다. 어제 있던 일이라 내가 정확히 묘사했는지 모르겠지만..
대학원 준비하는 애 옆에 앉아서 이런 말을 직설적으로 듣자니 가슴이 아팠다. 몇 마디 나누지도 못했지만. 정작 교수님과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살짝 기분이 좋지 않을 정도지만 맞는 말이니까, 하고 웃어 넘겼는데. 점점 짜증이 나면서 열등감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자기 능력을 과대평가’라는 말이 제일 거슬렸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내가 거슬리는 말들은 내가 받아들이기 싫은 진실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공부를 하려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우체국으로 가서 지연언니 졸업장을 부쳤다.
그리고 오늘까지 그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자기 능력 과대평가 -> 내 고질병인 망상인가? -> 허언증? -> 역시 나는 다시 상담을 받던지, 약을 먹던지 해야 하는 걸까.
나는 지연이처럼 나 자신에게 엄격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도피처를 만들어서 나를 스스로 특별하고 마음만 먹으면 천재처럼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왜 그럴까. 그렇게 생각해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예전 상담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선생님 저는 어렸을때부터 그 또래들과 달리 철학책이나 어려운 책을 읽으면서 묘한 우월감을 느꼈어요. 진짜로 그런 것들을 좋아한 것 같지는 않아요.
그러자 선생님은 내 솔직한 직관을 칭찬하며, 당시의 상황(가정형편)에서 그렇게나마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라고 말씀해주셨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지금은 왜 또 이런 바보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는 것일까. 취업에 대한 스트레스?
나이 먹어서도 이 병을 고치기 힘들다.
역시 약을 먹어야 하는 걸까.
일주일 내내 밥 먹고 -> 생각하다가 -> 자고 -> 생각하다가 -> 자고 이 패턴을 반복했다. 덕분에 살이 찌고 여드름이 올라오기 시작했으며 마음이 조급해졌다. 우울한 마음을 다잡고 나흘만에 대문을 나섰다. 학교에 갔다. 새내기들이 많이 보인다. 첫 수업을 대강 듣고 강의실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울컥 슬퍼졌다. 날씨 탓인가? 이제 정말 아무도 없구나. 원래 수업도 혼자 잘 듣고 친구가 있어도 학식에서 밥 혼자 먹는 게 더 편하던 나였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그리워졌다. 어디서 시간을 때울까, 하다가 여성학 pc실에 들러서 컴퓨터를 했다. 수강신청 정정기간이라 그런지 pc실에 사람들이 많았다. 간만에 웹서핑도 했다. 이쯤 되면 꽤 시간이 흘렀겠지, 생각하며 휴대폰 시계를 봤는데 채 한 시간도 안 지났다. 학생회관에 들러서 성적표 출력해오고 대학원 1층에 들러서 근로 일정 확인하고 출출해져서 학식으로 향했지만 2시부터 2시 반까지는 학식이 제공되지 않는다는 말에 다시 pc실로 돌아왔다. 갈 곳이 없었다. 이런 상황이 올 줄 알고 토익 단어집을 가져왔지만 공부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본관 ATM에 들러서 국민은행 계좌에 있던 돈을 하나은행 계좌로 옮겼다. 외로운데 혼자 영화나 보러 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빨리 집에 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연이가 학교에 있었다면. 늘 그렇듯이 먼저 연락하지는 않았겠지만 이렇게 외롭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문관 210호로 가면 언제든지 새봄이와 은지가 반갑게 인사해 줄 것 같은데 이제 갈 수가 없다. 차라리 학교 앞에서 자취라도 했었으면 어쩔 수 없이 학교에 남아서 공부라도 했을 텐데.
갑자기 서러워졌다.
그러고 보니 오늘 지연이가 꿈에 나타났었지.
꿈속에서 지연이와 아이맥스로 와치맨을 봤다. 카페인지 식당인지 모를 곳에서 지연이와 대화를 나누었다. 꿈속에서 지연이는 자기 친언니가 자기 머리를 고데기로 말아주다가 태워먹었다고 말했다. 뜬금없이 이런 꿈을 꾸다니. 그동안 내가 지연이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었구나 싶었다. 이대는 캠퍼스도 넓은데 얘가 혹시 길이나 안 잃어버릴지, 수강신청은 잘 했을지 걱정도 되고, 오늘 꿈에도 나와서 먼저 연락이나 해볼까 싶었지만. 늘 그렇듯이 먼저 연락하기 힘들어서 포기했다. 은이를 불러볼까 했지만 알바중일 것 같고, 은희는 회사원이니까 낮에 보기는 힘들고..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내 곁에 있던 사람들을 떠올려보았다. 나에게 먼저 연락해주고 손을 내밀어준 친구들에게, 나는 왜 그토록 변덕스럽고 유별나게 굴었을까.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정말 잘 해줄 수 있는데. 후회해봤자 늦은 일이다.
결국 3교시 수업 하나 달랑 듣고 한 시간 동안 컴퓨터 좀 하다가 바로 집으로 와버렸다. 집으로 오는 길에 친구들에게 전체문자를 돌리는 상상을 했다. "그동안 나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준 인연들에게 감사. 괴팍한 나를 견뎌줘서 고마워요. 다들 사랑해"라는 문자를 보내는 상상이었다. 친구들의 피드백도 상상해보았다. 대부분 갑자기 왜 그러냐, 이제야 정신 차렸구나 하는 답문이 오겠지. 지연이나 선형이, 학숙이는 뭔가 낌새를 채고 나에게 전화를 할 것 같았다. 특히 지연이는 이런 문자를 보내면 나를 많이 걱정할 것 같았다. 그래서 시도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상상에 그치는 내가 싫다. 하지만 이건 배려니까.
내일은 1교시 전공 수업이 하나 있다. 아직 들을지 말지 결정하지 못했는데 그래도 가야겠지. 힘든 하루가 될 것 같다.
상담의 한계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마음 먹은 날이었다. 선생님께 제가 언제까지 상담을 받아야 하냐고 여쭈어보았다. 본인이 정 하기 싫다면 방법은 없겠지만 xx씨는 계속 나와주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2월을 마지막으로 학교를 떠난다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학교 측과 이야기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고민을 하다가 그만두기로 결정하셨다고 어렵게 말씀하셨는데 갑자기 슬퍼졌다. 당황했다. 나는 선생님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떠난다고 하니까 울음이 터져 나왔다. 긴 이야기를 새로 올 사람에게 고스란히 털어놓아야 한다니, 나를 잘 아는 사람 중의 한명이 나를 떠나간다니, 온갖 생각이 들면서 펑펑 울었다. 특히나 내 이성과 감정에 대한 불일치 때문에 더욱 괴로웠다.
상담을 받을 때마다 김수진 선생님은 그저 상담 선생님일 뿐이고, 나는 선생님이 치료하는 수많은 학생들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일부러 거리를 두어 왔다. 애초에 나는 그 선생님한테 별 관심이 없었다. 아니 그렇다고 착각했을 뿐이다. 그런데 갑자기 떠난다니 주체할 수 없이 슬퍼져서 초등학생처럼 입술을 실룩거리며 울었다.
하루종일 슬펐다. 이렇게까지 슬퍼할 이유는 없었는데 왜 이럴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내가 그동안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여 무관심하게 떠나보낸 사람들이 사실은 내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 사람들일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왜 항상 내 판단이 옳다고 생각했을까, 내 감정을 나도 모른다면 나를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 때문이다. 나는 나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나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있다.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나보고 복잡하고 냉담한 외면 안에 고운 결(?) 비슷한 무엇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얘기를 하면 싫어할까봐 말하지 못했다,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그런 뻔한 멘트에 넘어가서 또 엉엉 울었다. 이 글을 쓰면서도 그 이야기가 진심일지 아닐지 의심하는 내가 싫다.
예상외의 상실감을 느낀 하루다.
만약 S도 영영 떠난다면?
상상조차 하기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