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 다녀왔다.

from 기록 2016. 11. 6. 01:47

어제 광화문에 다녀왔다. 글쓰기 모임에서 알게 된 분과 함께였다. 집회는 처음인데다가 살수차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이나 떨었는데, 다행히도 질서를 지킨 사람들 덕분에 별 탈 없이 집에 도착해 이 글을 쓰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반대 촛불시위 때도,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때에도 조용히 있던 내가 오늘 처음으로 집회에 나섰다. 집에만 있기가 부끄러워서다.

오늘 광화문에서는 남녀노소 모두가 ‘박근혜는 하야하라, 박근혜는 퇴진하라’를 외쳤다. 광화문 일대가 함성으로 가득찼다. 행진은 광화문에서 시작하여 종로와 종각 일대를 지나 을지로로, 시청으로 이동했다가 다시 세종대로 사거리로 돌아왔다. 평화적인 시위였기에 겁먹지 않고 행진에 참여할 수 있었다.

행진하는 무리 중에는 대학생, 직장인, 아이를 데리고 나온 평범한 부부들이 보였다. 특히 교복을 입고 나온, 앳되어 보이는 중학생도 볼 수 있었는데 그들을 보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그들 나이 때 정치와는 담을 쌓고 지냈으며 내 본분은 공부라고 생각했다. 대학생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일상이 정치와 맞닿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열심히 일하면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회사의 사탕발림에 속아 스스로를 노예처럼 생각하던 그때,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며 받았던 상처들, 새벽까지 열심히 일해도 채 150만원도 되지 않는 돈을 받아 학자금을 갚기 위해 허덕이던 날들, 상사로부터 성적인 농담을 들어도 인턴이라는 신분 때문에 하소연할 수 없었던 일 등등. 사회 구조가 불합리하다 느끼지만 각자도생이라는 말에 조용히 숨죽이며 살아왔다. 그러다 우연히 유범상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소통과 연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오늘 내가 처음으로 광화문에 나선 것도 따지고 보면 유범상 교수님 덕분이다.)

이야기가 옆으로 샜는데 어쨌든 약자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어이자 공격은 연대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오늘, 국민들의 의견을 묵살하는 거대 권력 앞에 많은 이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위에 가담한 수장을 끌어내리기 위해서다. 같이 슬퍼하고 같이 분노하는 모습에서 희망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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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자신만이 옳다고 여기는 노인이 있었다. 노인은 매사에 까다로웠다. 특히 음식에 관해서는 더욱 그랬다. 부인이 만들어준 음식은 물론이고 자식들이 맛집이라고 데려간 음식점에서도 한 젓가락을 집어 입에 넣은 뒤 나름의 품평을 하는 것이 그의 오랜 습관이었다. 문제는 대부분의 음식이 그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노인이 외식을 하자고 말하면 자식들은 서로에게 아버지를 모시고 가라며 떠밀기 일쑤였다. 오직 한 사람, 그의 부인만이 40년이 넘도록 그의 비위를 맞추어주었다. 대부분의 자식들이 그렇듯 이 집안의 자식들도 어머니의 인내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정기검진을 받으러 병원에 들른 노인은 자신이 당뇨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평소에도 건강에 신경을 많이 쓰던 자신이 왜 당뇨에 걸렸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홀로 생각에 잠긴 노인은 전라도 토박이인 아내가 만든 음식의 간이 너무나 세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병원에 다녀온 이후로 노인의 음식 투정은 더욱 심해졌다. 아내가 평소 노인이 좋아하던 장아찌를 밥상 위에 올리는 날이면 "날 죽일 셈인가"라고 말한 뒤 숟가락을 탁-소리가 나게 밥상 위에 던지고 돌아앉곤 했다. 한평생 남편의 성격에 기를 죽이고 살아온 아내의 분노가 쌓이기 시작했다.

노인이 등산을 다녀온 날이었다. 고된 산행에 지친 나머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노인은 마루에 쓰러졌다. 아내가 노인을 발견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도 일어날 줄을 몰랐다. 다급해진 아내는 앰뷸런스를 불러 병원으로 향했다. 의사는 저혈당으로 인한 쇼크라고 했다. 포도당 주사를 맞히고 나서야 노인의 의식이 돌아왔다. 기운을 차린 노인은 다음날 병원밥을 한 숟갈 떠먹더니 쌍시옷이 들어가는 말을 내뱉으며 숟가락을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괜시리 아내에게 반찬 투정을 하는 노인이었다. 아내는 앰뷸런스를 부른 내가 병신이지, 라며 식판을 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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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뉴스를 보고

from 기록 2016. 10. 25. 10:00



잠이 오지 않던 오늘 새벽, Jtbc의 뉴스를 보았다. 최순실의 PC 파일을 입수했다는 기사였다. 내용은 이 시간 대부분의 국민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대통령이 연설을 하기 전, 최순실이 연설문 44개를 파일 형태로 받았다는 것. 간단히 말하자면 한 나라의 수장이 동네 아주머니의 첨삭을 받은 글을 공식적인 자리에서 읊은 셈이다. 이는 누군가의 말처럼 봉건시대에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오죽하면 최순실 대통령, 박근혜 대변인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오겠나. 나라가 비선실세에 의해 좌지우지 되고 있다. 많은 이들의 노고로 힘들게 닦아놓은 민주주의라는 길이 한 여자에 의해 더럽혀지고 있다.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은 간단하다. 지금이라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원칙을 따져 잘잘못을 분명히 가려야 떠나는 민심을 조금이나마 붙잡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대통령직을 내놓는 것이 최선일지도 모르겠다.


+ 노무현 대통령 시절 연설문 만드는 방법.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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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8일 병원 방문

from 기록 2016. 10. 8. 09:41

의사 선생님께 잠이 늘고 꿈을 많이 꾼다고 했더니 꿈은 현실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방향으로 나타나는데, 기억나는 꿈이 있냐고 물으셔서 국감 관련되어 생전 처음보는 친구의 언니가 꿈에 나오고 이성이 나를 좋아해주는 꿈을 꾸었다고 답했다. 실제로 요즘의 나는 누군가 나를 좋아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었기에 의사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의사가 이성을 만나보는 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자, 나는 병 때문에 자신이 없고 병이 유전된다는 것을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됐다, 그리고 살이 쪘다.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의사는 병이 유전될 확률은 10에서 20퍼센트 사이이고 몸은 운동을 통해서 만들어가면 된다고 말했다. 어제 병에 대한 정확하지도 않은 글을 인터넷에서 너무 많이 읽은 것 같다. 아 참 그리고 의사가 나는 병 중에서도 증세가 약한 쪽이니 완치가 가능할 수도 있다는 식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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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하면

from 기록 2016. 10. 3. 19:31

멜랑콜리아. 노래 한 곡 듣고 가시죠.

https://youtu.be/Ty80gJfKD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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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에 다녀왔다.

from 기록 2016. 9. 29. 20:23

국감 때문이다. 취재를 위해 방문증을 받고 회의실로 올라가는 데 30분이 소요되었다. 방문증을 받으려면 국회 건물 후문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몰라서고, 취재증을 받지 않은 채 회의실에 들어가려고 하다가 퇴짜를 맞았기 때문이다. 국회 건물은 또 왜 이리 넓은지 가뜩이나 길치인 내게 원하는 곳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국감 시작 30분이 지나 회의실에 들어서니 이미 취재진과 참관인으로 붐비는 상태. 첫 국감 취재이기에 눈치만 보다가 사진 찍을 타이밍을 놓치기도 하고, 다른 기자에게 "이쪽으로 지나다니면 안된다"는 말도 들었다. 

여당 측 의원은 한 명만 참석한 채로 국감이 진행되었다. 여러 질문들이 오가는 사이 누군가는 진땀을 흘리고 누군가는 변명을 하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때로는 언성이 높아지는 때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당사자가 된 것처럼 긴장이 되어 뻣뻣하게 서 있었다. 이처럼 분위기가 감정적으로 흐르는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리고 당연하게도) 구체적인 수치와 팩트를 위주로 질문이 이어졌다. 이를 지켜보며 토론의 기술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상대방이 논점을 흐리더라도 이에 호도되지 않고 진실만을 추구하는 자세. 그리고 사회적인 약자를 대변하여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자세. 속사정이야 어찌됐든, 의원들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국회 앞에서 시위를 하는 사람들, 전경들, 힘들어보이던 회의실의 속기사들, 한 장이라도 좋은 사진을 얻기 위해 경쟁하듯 촬영하는 기자들, 국회의원 곁에서 귀엣말을 하는 보좌진들, 국회 건물 옆에 주차된 방송국 차량들, 추가 발언권을 얻기 위해 1분만을 외치던 의원들, 진땀 흘리던 이사장들 모두 기억에 남는다. 

서른 살 넘어 겪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시사와 정치에 좀 더 관심을 기울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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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성향테스트 결과

from 기록 2016. 9. 27.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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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하루

from 기록 2016. 8. 26. 15:46


단편 소설을 읽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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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를 위하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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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상한 점

from 기록 2016. 8. 10. 22:05

동인천 급행 열차를 타고 귀가하던 길이었다. 사람이 많아 출입문에 바짝 붙어 서 있었는데 문득 왼쪽 발가락이 부러졌던 예전의 일이 떠올랐다. 곧이어 출입문 사이에 발이 빠지거나 신발 한 짝이 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출입문 사이에 내 머리카락이 끼어 두피가 벗겨지면 어떡하나 싶은 생각까지 도달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어제 TV를 통해, 놀이기구에 머리카락이 끼어 두피가 벗겨진 아이의 사진-모자이크로 처리한-을 보아서인가보다.) 두피가 벗겨지는 대신 목숨이라도 건지면 다행일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목적지에 이르렀다. 어릴적부터 공사장 근처를 지나면 철근이 내 머리 위로 떨어질 것만 같아 무서웠고 성인이 된 지금은 전철이 덜컹거리며 한강을 지날 때마다 겁이 나 머릿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려 애쓴다. 사소한 일에서 최악의 사태를 상상한다. 나도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고보니 지금도 걱정하는 것을 걱정하고 있구나. 무언가 중요한 일에 대한 고민을 사소한 걱정으로 덮어버리려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작년 말에는 북한이 남한에 핵을 쏘면 어쩌지라는 생각에 심각하게 고민한 적도 있다. 쓰고보니 범불안장애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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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모임을

from 기록 2016. 8. 10. 11:46

몇 달간 쉬기로 했다. 인풋이 부족하여 글이 써지지 않는 것 같아 모임을 그만두어야 할 것 같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모임에 합류하고 싶다는 식으로 모임장에게 메세지를 보냈다. 글쓰기는 어렵지만 사람들이 워낙 좋고, 한 번 그만두면 다시 글을 쓰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 망설였는데,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모임장이 쓰면서 쉬는 게 어떻겠냐고 말했다. 결국 그만두겠다는 말을 번복하고, 모임을 몇 달 쉬겠다고 했다. 가족들은 왜 그만두지 않느냐고 묻는다. 능력이 부족한데 모임을 그만두지 않는 것도 욕심일지는 모르겠으나, 글쓰기만큼은 욕심 좀 부려보려고 한다. 더위가 풀리면 일단 책부터 많이 읽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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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from 기록 2016. 8. 8. 14:27

책도 안읽고 글도 쓰지 않은 채 휴가를 보냈다. 엄마와 여동생과 동네 맛집 투어를 했다. 밥먹고 스타벅스 가고. 밥먹고 스타벅스 가고. 이걸 사흘이나 반복했더니 솔직히 지루했다. 가족과 보내는 시간에 의미를 두어야겠지만 솔직한 내 마음은 혼자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싶은 걸. (하지만 이마저 제대로 안되니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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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용실에서

from 기록 2016. 8. 8. 14:18

미용실에서 머리를 했다. 펌이 풀린 머리카락이 보기 싫어 볼륨 매직을 해달라고 말했다. 원장이 내 머리를 만지며, 머리카락이 푸석하니 영양 서비스를 받아보는 게 어떠냐고 권유했다. 가격은 오만원. 내 벌이 수준에서는 감당이 되지 않아 사양했다. 곧 수습생이 왔고, 원장은 수습생에게 미용 기술을 가르쳤다. 거기에 사족처럼 덧붙인 말이 기억에 남는다. "일을 할 땐 항상 긴장하고 있어야 해." 내가 일을 할 때에는 어떤지 돌아보게 된다. 긴장을 하지 않고 축 늘어진 태도로 설렁설렁 일을 한다. 하고 싶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핑계를 대 보지만, 내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사장으로부터 잔소리를 듣는 것도 일을 대하는 내 태도 때문이다. 얼마 전 엄마와 찻집에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그 때도 "모든 일을 할 때에는 완벽하게 끝내려고 노력하라"는 말씀을 들었다. 매사에 집중하기가 어렵다고, 내가 성인 자폐일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꺼내자 모든 것을 병 탓으로 돌리려는 태도를 고쳐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맞는 말이다. 십 년 전만 하더라도 완벽주의가 나를 옭아맸는데, 그동안 무슨 일이 생긴건지 지금은 나사빠진 로봇처럼 멍하게 하루를 보내기 일쑤다. 오늘은 열 두 시간이 넘게 자고 일어났다. 무엇이 나를 게으르게 만드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좋아하던 독서도 되지 않고. 무기력증에서 벗어나고 싶다.

다시 미용실 이야기로 돌아와서. 이번에는 남자 수습생이 다가오더니 내 머리를 고데기로 펴기 시작했다. 그가 긴장하고 있는 게 느껴져 내 몸에 힘이 들어갔다. 마치 스릴러 영화를 볼 때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해야 할까. 여자 수습생은 내 머리를 감겨주며 "(아까는) 원장님 앞이라 긴장했어요"라고 말했다. 수습생들이 긴장하는 걸 보니 나도 긴장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저들은 한 달에 얼마를 받고 일을 하는 걸까, 설마 열정페이는 아니겠지'부터 시작해 남자 수습생의 팔뚝에 새겨진 문신을 신경쓰며 여자 수습생에게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라고 말을 해줄걸 하는 후회까지.... 온갖 잡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손님인 내게 과일까지 대접하는 이 친절한 미용실 계산대 앞에서 카드로 결제할지, 현금으로 결제할지를 두고 고민하다가 카드를 내밀었다. 카드를 받아든 수습생과 옆에 서 있는 원장의 얼굴은 예상과 달리 떨떠름한 표정은 아니었다. 왠지 모를 안도감에 카드를 다시 받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미용실을 나왔다. 고작 머리 하나 하고 왔을 뿐인데, 어려운 시험문제를 푼 것처럼 머리가 아프다. 나는 쓸데없는 생각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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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문

from 기록 2016. 7. 12. 17:31

황급히 쓴 단편(이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글)을 스터디원들에게 보여주고 합평을 받았다. 합평글이 총 세 개인데, 웃기지만 무서워서 하나밖에 못 읽었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얼마나 생각없이 글을 썼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평이었다. 엄마와 딸이 레즈비언인 단편이었는데, 나는 레즈비언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진짜 레즈비언이 내 글을 읽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당연한 말이지만 시간에 쫓기며 황급히 글을 쓰니 퀄리티가 떨어진다. 평소에 독서를 게을리하고 글감을 생각해두지 않은 탓이다. 어째 일기를 반성문처럼 쓰게 되는데, 정말 반성해야 한다. 성소수자에 대한 어설픈 소설이 그들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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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봄이 되면 다양한 나물을 밥상 위에 올렸다. 입춘이 지나면 외가에서 직접 냉이를 캐어와 누런 잎을 떼고 다듬어 살짝 데쳐 무치거나 국을 끓였다. 냉이를 넣은 된장찌개는 구수하기 그지없었다. 달래는 수염뿌리를 잘라 물로 씻은 뒤 짧게 끊어 간장과 고춧가루로 만든 양념장에 넣었고, 우리는 이 양념장에 갓 지은 밥을 비벼 먹었다. 식초와 간장, 고춧가루와 깨소금, 참기름을 넣은 돌나물은 씹는 맛이 좋았다. 고추장에 빨갛게 무친, 쌉싸름한 씀바귀는 내가 서른이 넘어서야 좋아하게 된 반찬이다. 통통한 두릅 역시 씹기 불편하여 어릴 때는 꺼린 음식이었다. 지금은 무르지 않게 살짝 삶아낸 두릅을 젓가락에 돌돌 말아 초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느껴지는 독특한 향을 좋아한다.

여름이 되면 엄마는 빨간 냉면 양념장을 한가득 만들어두었다. 집에 손님이 방문하면 즉시 칡면을 삶아내 양념장을 부어 삶은 계란을 올린 비빔냉면을 대접하기 위해서다. 혀가 얼얼해지는 냉면의 매운 맛에 중독된 사람들은 여름이 되면 어김없이 냉면을 먹으러 우리집을 찾아왔다. 엄마는 유난히 더위를 타는 동생을 위해 얼음을 띄운 냉미역국을 만들어두었다. 새콤한 냉미역국을 들이키면 얼굴 위로 흐르는 땀을 잊을 수 있었다. 복날이면 국내산 토종닭을 구해와 밤, 인삼, 대추를 넣고 푹 고아 백숙을 만들어 먹였다. 쫄깃한 닭가슴살과 찹쌀을 씹고 육수를 들이키면 속이 든든해졌다.

짭쪼름한 양념이 배인 무를 씹는 식감이 일품인 고등어 조림이 밥상 위에 올라올 때면 가을이다. 입맛이 없을 때면 밥에 물을 말아 칼칼한 고등어 살을 발라내 먹었다. 찰랑거리는 덩어리를 썰어 양념장에 찍어 먹는 도토리묵 역시 일품이었다. 손이 큰 엄마는 곱게 간 국내산 도토리 가루를 구해와 물에 풀어 끓인 다음 굳혀 한가득 묵을 만들어 친척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겨울이 되면 엄마는 늙은 호박의 속을 파내 은근하게 달큰한 호박죽을 만들었다. 테두리가 황금색으로 빛나는 호박씨는 한 데 모아 말린 뒤 껍질을 까먹는 재미가 있었다.

주방에서 이 모든 음식이 뚝딱 만들어지는 동안 나는 방에서 책을 읽었다. 음식과 집안일은 엄마의 몫이고 나는 그저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는 게 효도라고 알고 있었다. 

각양각색의 찬이 차려진 밥상 앞에 식구들이 앉으면 자리가 부족했다. 그럴때면 엄마는 주방 한켠에 쪼그리고 앉아 양푼에 고추장, 나물, 헌 밥을 넣고 비벼 먹었다. 국은 늘 따뜻했고 밑반찬은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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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23일

from 기록 2016. 5. 24. 16:44

카카오톡 프로필 문구에 이소라 콘서트에 가고 싶다고 적어놓았더니, 친구로부터 같이 콘서트에 가자는 메시지를 받았다. 대뜸 돈 생각이 났다. 표 값 십만원이면 부모님이나 신세졌던 친구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사고도 남는 돈이다. 돈이 아깝다는 생각과 동시에 왜 나는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저지르지 못하나 싶었다. 그놈의 돈이 뭔지. 결국 친구 혼자 공연을 보러 가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 친구는 공부든, 여행이든, 무엇이든 간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꼭 이루고야 만다. 나도 얘처럼 한 번 뿐인 인생, 마음 가는 대로 살아보자 싶다가도 문득 겁이 나버려 그만두어버린다. 나이를 먹을수록 익숙한 게 좋아지고 과거의 향수에 빠지는 시간이 늘어난다. 새롭고 어려운 문제에 도전하는 게 꺼려진다. 멋있게 나이들고 싶었는데, 마음대로 잘 안 된다. 부디 꼰대만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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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의 나는,

from 카테고리 없음 2016. 4. 28. 17:25

바보가 되어간다. 덧셈과 뺄셈이 쉽지 않고, 어떤 상황을 누군가에게 설명해야 할 때 적절한 단어를 떠올리기가 힘이 든다. 독서에 집중이 안 되는 건 삼년 째고. 확실히 삼 년 전보다 지적인 활동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온라인으로 아이큐 테스트를 했는데, 예전 같으면 암산으로 풀었을 문제도 끙끙대며 풀었다. (회사 컴퓨터로 아이큐 테스트를 하느라 눈치가 보여서 끝까지 문제를 풀지 못해 내 아이큐가 몇인지는 모르겠다. 어차피 정식 테스트도 아닌 걸.)

그나마 머리가 돌아간다고 느낄 때는 글을 쓸 때이다. 그런데 이 글이란 게 내 생각을 주절주절 늘어놓는 건 쉽지만 기사를 쓸 때에는 흐름을 맞추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리드와 맺음말을 쓰는 것도 어렵고. 우연히 경쟁사 잡지 기사를 읽었는데, 기자의 글솜씨가 빼어나 질투를 느꼈다. 오죽하면 얼굴도 본 적 없는 그 기자가 꿈에 나타났을까. 아무래도 내가 ADHD에 걸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집중력이 떨어졌다. 의사 말로는 운동을 하면 집중력이 좋아진다는데. 헬스장에 등록을 하고 운동을 나간 지 이틀째다. 러닝머신을 시속 6km 속도로 한 시간을 빨리 걸었는데, 지겨워서 혼났다. 너무 지겨워서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욕이 나올 정도로. 오늘 인터넷으로 유산소 운동을 검색해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걸 지겹다고 느낀단다. 근육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나는 근력운동을 해야 하니 트레이너가 PT를 받아보라는 식으로 권유를 한다. 나도 PT를 받고 싶지만 쥐꼬리만한 내 월급으로는 어림도 없다. 헬스장의 GX(Group Exercise) 프로그램을 따라하면서 유산소 운동을 병행해야겠다.

 

버트런드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은 끝내 읽지 못했다. 난독증인 주제에 너무 어려운 책을 골랐나보다. 내 능력에 비해 지적인 욕심이 과했다. 지금 내 수준에서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을 골라서 보아야겠다.

 

회사에서 전화받는 게 두려워 고민이다. 자주 들르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회사에서 전화 받기가 무섭다는 글을 올렸는데,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 동질감을 느꼈다. 메모를 하고 평소에 전화하는 데 익숙해지라는데. 그러고보니 나는 평소에 친구들은 물론 가족과도 거의 전화를 하지 않는다. 그나마 엄마가 먼저 전화를 걸면 받는 편이고. 어릴 때 빚 독촉 전화를 많이 받아서 그런가. 회사에서 내 전화기에 벨이 울리면 긴장이 된다. 메모를 하며 통화를 해도 나는 말귀가 어둡다. 친한 사람하고 전화할 때에는 그렇지 않은데.

 

너무 자책만 했나. 내 장점 중 하나는 다른 사람의 기분에 민감하다는 사실이다. 십 년 전만 하더라도 남의 감정에 공감을 못 했는데, 이런 걸 보면 내 MBTIINFP로 바뀐 것 같다. 세상을 보는 시야가 많이 달라졌다. 지금의 나도 좋지만 냉철했던, 그러니까 MBTIINTP였던 때가 그립기도 하다. 지식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던 내 두뇌가 굳어버린 것 같아 슬프다.

 

십 년 전에 비해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다. 나는 한강 위를 달리는 전철을 타기가 두렵다. 혹시나 내가 탄 열차가 탈선해 한강 속으로 고꾸라지면 어쩌나 싶어서다. 과속하는 버스도 마찬가지다. 나는 쓸데없는 일에 너무 걱정을 많이 한다. 운동을 하면 이런 걱정들이 줄어들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여전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초등학생 때만 해도 해도 서른이 되기 전에 죽어버리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다니는 회사 사무실에서는 늘 FM4U 라디오를 틀어놓는다. 여기 직원과 사장님은 적막이 싫었나보다. 재치있는 DJ의 말이 재미있을 때도 있지만 라디오에서 흐르는 노래의 대부분이 내 취향이 아니다. 게다가 전화를 받을 때 라디오 소리에 상대방의 목소리가 묻혀 죄송하지만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시겠어요?”라고 부탁할 때도 있고. 난 조용한 게 좋은데, 회사에서 내가 막내이니 어쩔 수 없지. 오늘은 사무실에 혼자 있어서 유투브로 내가 듣고 싶은 노래만 틀어놓고 있다.

 

나는 이렇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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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헬스장에 들러 상담을 받고, 1년치 비용을 지불하고 왔다. 목표는 20kg 감량.

사실 많이 절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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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읽은 책들

from 카테고리 없음 2016. 4. 10. 18:44

아래는 끝까지 읽은 책들.


구관조 씻기기 - 황인찬

죽어가는 짐승 - 필립 로스


황인찬 시인의 이름은 '이동진의 빨간책방'이라는 팟캐스트를 통해 처음 접했다. 젊은 시인은 어떤 시를 쓸지 궁금했는데, 그의 시를 읽고 놀랐다. 시어와 시어 간격이 투명하고 여백이 있다. 한 시에 등장하는 사물인 '백자'처럼. 표현력이 부족한 나로서는 무어라 콕 집어 설명할 수는 없지만, 투명한 느낌이 좋았다.

두 번째 책은 이웃 블로거의 별 다섯 추천을 받은 필립 로스의 '죽어가는 짐승'이다. 누구나 그렇듯 나 역시 박범신의 '은교'가 떠올랐다. 육십이 넘은 남교수의 성욕과 지성이 어우러진 작품이다. 야한 내용도 누가 쓰느냐에 따라 소설의 분위기가 달라짐을 느꼈다. 필립 로스의 지적인 표현력이 일품이다.


요즘 읽고 있는 책은 다음과 같다.


애니어그램의 지혜 - 돈 리처드 리소, 러스 허드슨

타인보다 더 민감한 사람 - 일레인 N. 아론 

만들어진 신 - 리처드 도킨스

게으름에 대한 찬양 - 버트런드 러셀


'애니어그램의 지혜' 본문을 보고 자가 테스트 한 결과, 나는 애니어그램 4번에 5번 날개를 쓰는 것으로 추정된다. 20대 초반 MBTI 검사 결과, INTP유형에 애니어그램은 5번이었다. 현재 정식으로  MBTI 검사를 받아본 적은 없지만 친구 말로는 INFP로 보인단다. 확실히 나이를 먹으면서 감정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탐구에 대한 욕망은 남아 있어 5번 날개를 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성과 감정이 골고루 어우러진 사람이 되고 싶다. 도서관에서 '신과 나눈 이야기'를 찾다가 같은 서가에 꽂힌, 우연히 '만들어진 신'을 보고 도킨스의 책을 집어든 건 죽어가는 지성(-.-)을 깨우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만들어진 신을 읽는데, 독해가 쉽지 않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공부를 손에서 놓은 탓일테다. 

'타인보다 더 민감한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읽은 책이다. 부모님께서도 나를 민감한 사람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게으름에 대한 찬양'은 좋아하는 이가 읽던 책이다. 김영하의 팟캐스트에도 추천된 적이 있어 읽는 중인데 페이지가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도킨스의 책과 마찬가지로 천천히, 꾸준히 읽을 생각이다. 

소설쓰기 모임에서 소설 작법책을 정해 스터디를 하기로 했다. 책은 '소설쓰기의 모든 것'. 며칠 전 합평에서 내가 쓴 소설이 '발사되지 못한 총알'같다는 비유를 들었다. 또 다른 분은 소설 작법에 관한 내용을 장문의 카톡 메세지로 보내주시기도 했다. 여러모로 자극이 된다. 조만간 작법책도 읽어야 한다. 


그러고보니 나는 책 한 권을 끝까지 읽기 보다는 여러권을 동시에 읽는 편이구나.


바쁜 한 달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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