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는 성당을 찾는다. 삶에는 분명 이성과 감성만으로 채울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걸 느낀다. 죽음이 우리 앞에 있다는 걸 안다면 태만해 질 수 없다는 봉사자의 설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내일 죽는다면 무엇을 후회할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내가 아끼는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공유하지 못한 점, 사랑했던 사람에게 속마음을 온전히 표현하지 못했던 점, 머릿속에 가득한 생각을 현실로 옮기지 못한 점, 타인에게 상처주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에 스스로를 괴롭혔던 모습이 떠올랐다. 남에게 기쁨을 주고도 스스로 기쁘지 않다면 잘못된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 한다. 완벽함을 추구하며 스스로와 타인에게 엄격했던 삶을 살아왔노라고 회고하는 봉사자의 말을 듣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 이야기 같아서다. 재물의 노예가 되지 말라는 과거 카톨릭의 율법은 요즘 사람들에게 자신이나 일, 혹은 명예의 노예가 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 가능하다. 나는 내 자신의 노예로 살아왔다.
며칠 전 받은 상담에서도 비슷한 문제를 느꼈다. ‘강점 확인표’에 수록된 60개 문항 중 내 강점이라고 생각하는 문항에 표시를 하는데, 상담 선생님이 내게 ‘외국어를 할 수 있다.’는 항목에 동그라미 표시를 하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 중국어 발음은 유창하지만 독해와 쓰기가 기초 수준이라고 답했다. 상담 선생님은 본인 역시 기초적인 외국어 실력의 소유자임에도 불구하고, 문항에 동그라미 표시를 했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내 장점에게조차 인색했다. 완벽주의 때문이다. 중국 사람이라고 해서 완벽한 중국어를 구사하는 건 아니다. 아나운서도 국어사전의 모든 낱말을 꿰고 있지는 않다. 완벽이라는 건 누군가 규정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그동안 나만의 높은 기준을 만들고, 이에 도달하지 못하면 스스로를 괴롭혀왔음을 깨달았다. 남의 잘못에는 관대하면서 왜 스스로와 가까운 사람에게는 지나치게 높은 기대를 가졌을까. 남들보다 특별하고 우월해지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욕심에서 출발한 선행은 교만에 가깝다. 교리 수업에서 성경을 읽고 자신의 교만함을 이야기하는 시간에 나는 스스로를 챙기지 못하고 신을 닮으려 했던 나의 교만을 고백했다. 남들에게 내 것을 베풀었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하지 못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이 날 교리 수업 시간에 카톨릭의 ‘사랑’에 대한 해설을 들었다. 사랑은 측은지심에서 시작한다. (자신이 쓴 책에 ‘꿈보다 연민’이라는 글귀를 적어 사인해주는 이동진 영화 평론가가 떠올랐다.) 고통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그러니 함부로 사랑한다 말하지 말지어다.) 자신의 목숨을 바칠 만큼 사랑하라. (사랑은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작은 일부터 사랑을 실천하다보면 어느새 눈덩이처럼 사랑이 부풀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 자신부터 사랑하기로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