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빠지게 하는 사람, 얼마 남지 않은 통장의 잔고, 깊이 패여 가는 부모님의 주름살, 퇴사를 권유하는 상사의 목소리, 白紙

 

-나를 사랑에 빠지게 하는 사람

지인들 말로는 내가 금사빠라고 한다. 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나는 동의할 수 없지만 주변에서는 그렇다고 한다. 내가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다. 자기 세계가 뚜렷하고 글을 잘 쓰는 사람. 두 번째 남자친구가 그랬고, 현재 내 짝사랑 상대가 그렇다. 사랑에 빠지게 하는 사람이 왜 나를 곤란하게 만드느냐 하면, 일단 일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든다. 멀티태스킹과 거리가 먼 나는 한 번에 한 가지 생각만을 깊게 하는 사람이다. 사랑에 빠지면 일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가장 최근에 다닌 직장을 그만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서 일에 집중을 하지 못한 탓도 크다.

 

-얼마 남지 않은 통장의 잔고

철새처럼 직장을 옮겨다니다보니 통장에 잔고가 넉넉할 리 없다. 씀씀이가 크지 않은 편이라 돈을 버는 일에도 소홀한 듯하다. 친구들의 경조사가 다가올 때마다 불안해진다. 크지 않은 씀씀이는 어쩌면 버는 돈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내가 설사 전업 작가가 된다 해도 통장의 잔고는 여유가 없는 날이 많을 테다. 회사에 입고 갈 옷이 없어 동생과 쇼핑을 하며 돈을 많이 썼던 날이 있다. 책을 좀처럼 읽지 않는 동생이 상당히 문학적인 표현을 썼다. “언니 통장이 놀랐겠네.” “?” “돈을 갑자기 너무 많이 써서.”

 

-깊이 패여 가는 부모님의 주름살

엄마는 1961년생, 아버지는 1955년생이다. 환갑을 넘긴 아버지는 눈매의 살이 쳐져 눈을 덮어 우는 상이 되었다. 엄마는 눈을 치켜뜰 때마다 이마에 주름이 패인다. 이렇게 시간은 흐른다. 부모님이 늙어가는 것도 두렵지만 내가 의지할 곳이 사라진다는 것도 두렵다. 나는 아직도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부모님으로부터 독립을 하지 못했나보다. 어느날 갑자기 교통사고가 나서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날을 상상한다. 여동생과 남동생은 능력이 있으니 그런대로 잘 살겠지만 나는 집도 없이 혼자 버려져서 사회복지사의 도움을 받아 근근히 명을 이어가겠지.

 

-퇴사를 권유하는 상사의 목소리

올해만 들어 직장을 세 군데나 다녔다. 지금은 무직상태. 자진 퇴사한 곳은 한 군데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권고사직이다. 그나마 그 한 곳도 반 강제로 그만둔 곳이나 다름없다. 일을 하지 않고 오랫동안 쉬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절반은 내 병 때문이기도 하다. 상사의 말을 못 알아들었다. 들어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지나치게 긴장하면 머릿속이 하얘지는데, 이런 증상이 계속되다보니 정상적으로 근무하기가 힘들어졌다. 한 군데에서는 카카오톡 메세지로 퇴사를 통보했고, 가장 최근에 다닌 직장에서는 상사와의 면담을 통해 해고를 통보받았다. 인생에서 실패의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나지만 역시 씁쓸한 일이다.

 

-백지

이건 사실 부끄러운 고백인데, 언제부터인가 백지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부터다. 내 글은 솔직하지만 세련되지 못하다. 좋은 문장은 어떻게 태어나는 걸까. 다독과 다상량. 나는 이 두 가지가 부족하다. 백지에 대한 공포를 없애기 위해 글쓰기 좋은 질문 642’라는 책에 나온 주제로 무언가를 쓰고 있는 중이다. 쓰다 보면 나아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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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diohead‘videotape’을 듣고.

 

멀지 않은 과거에 비디오테이프라는 게 있었다. 주로 영화를 볼 때 비디오 플레이어에 이 물건을 집어넣어 재생시켰고, 비디오 플레이어에 녹화 기능이 있어 내가 원하는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녹화도 할 수 있었다. 인터넷을 통해 검색해보니 가정용 비디오테이프의 크기는 가로 18.7cm, 세로 10.3cm, 높이 2.5cm이다. 예나 지금이나 금지된 것을 욕망하는 마음이 앞선 십대들은 누구나 한번쯤 부모님 몰래 야한 비디오테이프를 빌려서 보다가 테이프 부분이 플레이어에 씹혀서곤란했던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내 여동생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 생각하면 왜 미성년자 관람불가인지 궁금한 영화 타이타닉을 부모님 몰래 보다가 테이프가 플레이어에 걸린 것. 나는 이 일로 몇 차례나 동생을 놀렸던 기억이 난다.


스마트폰이 보편화된 지금이야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영상을 볼 수 있지만 90년대 초반에는 영상을 볼 수 있는 매체가 TV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다. 원하는 영상을 보려고 하면 녹화를 떠 둔 비디오테이프를 플레이어에 재생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돌잔치, 입학식, 졸업식과 같은 행사 날에는 8mm 홈비디오 캠코더로 영상을 찍어 비디오테이프로 간직했다. , 그리고 갑자기 생각난 추억 하나 더. 음악 순위 프로그램을 보다가 좋아하는 가수가 TV에 나오면 재빨리 쓰지 않는 비디오테이프를 플레이어에 삽입한 뒤 녹화 버튼을 누르던 게 생각난다. 그런 식으로 한 가수가 부르는 노래를 계속 녹화해 한 시간짜리 긴 영상으로 볼 수 있었다. 내가 중학생 때 통학하던 버스에서는 중앙에 TV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아이돌 가수의 팬들이 각자 좋아하는 가수의 모습이 녹화된 비디오테이프를 가져와서 서로 자기 것을 틀어달라고 경쟁하곤 했다.


그랬던 비디오테이프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아마도 인터넷이 대중화된 무렵부터인 듯하다. 집에 있던 비디오 플레이어는 부모님이 이사를 하면서 버린 것 같고, 내 유치원 시절이 찍힌 비디오테이프도 보이질 않는다. 풀지 않은 이삿짐 어딘가에 쑤셔 박혀 있을테지만 유년기의 추억이 통째로 날아간 기분이다. 포스트잇처럼 쉽게 찍고 쉽게 지울 수 있는 지금의 영상들도 분명 장점이 있지만, 한 번 찍으면 테이프가 늘어져 닳을 때까지 돌려보던 비디오테이프에 대한 추억이 사라져가는 것 같아 아쉽다. 요즘은 비디오테이프에 녹화된 영상을 디지털 파일로 변환해 보내주는 서비스도 있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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