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8/25 08:23
2014/08/25 08:23
짧지도 길지도 않은 사회생활을 하며 생긴 징크스 비슷한 게 있다. 초면에 내게 먼저 말을 놓던 사람들과는 끝이 좋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언니라고 불러"라며 친근하게 다가온 그녀들은 본인의 기분에 따라 존대와 반말을 섞는 경우가 흔했다. 물론 진짜 언니처럼 잘해주는 경우도 있었지만, 회사는 일을 하는 곳이다. 직급이 크게 차이가 나는 경우면 몰라도 (설사 그렇다 치더라도 회사 내 반말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손윗사람이 손아랫사람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먼저 말을 놓는 행동은 친근함보다 나이를 핑계로 상대방보다 높은 위치를 점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 나와 같지 않고, 말을 놓는 게 정말로 친근함의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기에 대개는 참고 넘어가지만 결국은 사이가 틀어져버리고 만다. 무례함이 일상이 된 세상이라서일까. 무례함을 친근함과 혼동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2014/09/02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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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가을이'는 최승자 시인의 시집, <이 시대의 사랑>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다.
최 시인을 생각하면 괜시리 마음 한 켠이 헛헛해지는데 이 감정은 시인과 비슷한 상황에 처한 내가 느끼는 연민 때문인지, 그녀가 노래하는 끝없는 절망 때문인지 헷갈린다. 부디 건강하시기만을 바랄 뿐
(2014/09/02 08:35)
2. 어렸을 적 나는 (어쩌면 지금도) 美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다. 초등학교 오학년 때 반에 무척이나 예쁜 친구가 있었다. 내가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가질 수 없을 정도의 미모를 지닌 아이였다. 외모만큼 유순한 성품을 지닌 친구 주변에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나는 친구의 습관이나 기호를 따르기 시작했다. 편지를 주고받으며 손글씨마저 예뻤던 친구의 글씨체를 흉내내고, 그녀가 좋아했던 연예인에 나도 열광하며, 친구 것과 비슷한 디자인의 점퍼를 사겠다고 고집을 부리며 시장통에서 엄마에게 울고불고 짜증을 냈다. 그녀는 일종의 워너비인 셈이었다. 친구와 비밀일기를 쓰고 편지를 교환하던 나는 우리가 절친한 사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왜 친구는 나와 친하게 지내는 걸까. 나는 그녀보다 나은 게 없다고 생각했다. 가끔 ‘넌 공부를 잘해서 좋겠다’는 글을 편지에 적어주긴 했지만, 우리는 성적보다 외모의 차이가 월등히 컸기에 그런 말은 내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도리어 친구가 나를 추켜세우는 모습은 외모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도 내가 그녀보다 한참 부족하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같은 중학교에 진학했지만 그녀를 따르는 동성, 이성 친구들이 늘어가면서 우리 사이는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질투를 느꼈다. 주고받던 편지는 뜸해졌고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우리는 연락이 닿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 TV나 잡지 화보를 숱하게 보더라도 친구만큼의 미모를 가진 연예인은 없었고 내 마음에 그녀의 이름 석자는 꽤 오랫동안,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와 동의어로 자리잡았다.
십년이 넘게 흐른 후 우연히 시내에서 마주친 친구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휴대폰 번호를 교환한 뒤 같이 차를 마시며 사는 이야기를 주고 받던 나는 아쉬움을 느꼈다. 살짝 찌푸린 미간과 치켜올라간 친구의 눈썹에서 삶의 피곤함이 보였다. 친구의 부드러운 입술에서 ‘지랄’이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에는 허탈함마저 느꼈다.
3. 그리고 금각사
4. 아버지의 얼굴은 초여름의 꽃들에 묻혀 있었다. 꽃들은 여전히 기분 나쁠 정도로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꽃들은 우물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했다. 왜냐하면, 죽은 사람의 얼굴은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이 지니고 있던 존재의 표면으로부터 무한히 함몰되어, 우리들을 향하고 있던 탈의 테두리 같은 것만을 남기고, 두 번 다시 끌어올릴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곳에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물질이 얼마나 우리들로부터 멀리 존재하며, 그 존재 방법이 얼마나 우리들로부터 소원한가 하는 점을, 죽은 사람의 얼굴처럼 여실히 설명해 주는 것은 없었다. 정신이 죽음에 의하여 이토록 물질로 변모함으로써, 비로소 나는 그러한 국면에 접하게 되었으나, 지금 나에게 서서히, 5월의 꽃들이라든지, 태양, 책상, 학교 건물, 연필…… 그러한 물질들이 어째서 그토록 나에게 서먹서먹하고, 나로부터 먼 거리에 존재하는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편, 어머니와 단가 사람들은 나와 아버지와의 마지막 대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 대면이 암시하는, 살아 있는 자들이 속한 세계의 유추를, 나의 완고한 마음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면이 아니라 나는 단지 죽은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있/었/다. 시체는 다만 보/여/지/고/ 있/었/다. 나는 다만 보고 있었다. 본다고 하는 것, 평소에 아무런 의식도 없이 하고 있는 대로, 본다고 하는 것이, 이토록 살아 있는 자의 권리의 증명이며, 잔혹함의 표시일 수도 있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참신한 체험이었다. - 36p (2014/09/11 11:14)
내 생각을 글이나 말로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꽤 오랫동안 블로그에 일기를 쓰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머릿속에 생각의 찌꺼기들이 엉켜붙은 느낌인데 이것도 병증인지는 잘 모르겠다. (2014/10/19 09:18)
(2014/10/27 19:47)
봉사활동을 했다. 학점 취득이나 입사 지원 시 가산점을 얻기 위한 목적이 아닌, 순수한 마음에서 시작한 생애 첫 봉사다. 서울시 동대문구 유적지(흥천사-정릉-의릉-영휘원-숭인원) 탐방 참가자들을 인솔 업무를 맡았다. 쾌청한 일요일 오전에 방문한 왕릉과 사찰이 얼마나 고즈넉했는지를 적고 싶지만, 핵심은 따로 있다. 바로 조직과 일에 대한 이야기다.
봉사자는 나와 안내원 둘 뿐이었다. 내가 할 일은 인원파악이었다. 40대 후반의 여자 안내원이 먼저 나서서 관광버스 인원을 확인해주자, 나는 고마운 마음과 동시에 무척이나 꼼꼼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첫 번째 유적지에서 일어났다. 탐방 후 집결지에서 인원을 점검하는데 관광객 네댓 명이 보이지 않았다. 인솔자인 내가 사찰 감상에 빠져 느긋하게 굴었던 게 화근이었다. 안내원은 뒤쳐진 참가자들을 후방에서 챙기지 않은 나를 탓했고, 나는 앞에서 인솔하라고 지시해놓고서 본인이 한 말을 기억하지 못한 채 나를 책망하는 안내원에게 화가 났다. “선생님이 앞에서 인원 챙기라고 말씀하셨어요. 바쁘셔서 기억을 못하셨나봅니다.” 나름대로 뼈있는 말을 던졌지만, 안내원은 내게 인원을 제대로 확인하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나는 사라진 이들을 찾기 위해 집결지와 관광지를 바삐 오가며 치솟는 짜증을 눌러야만 했다. 알고 보니 사라진 관광객들은 우회로를 통해 집결지로 모이는 중이라 눈에 띄지 않았던 것. 여자저차 일이 해결되고 버스에 올라 명상을 하며 불편한 내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애초에 스스로가 인솔자 역할에 충실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하지만 안내원으로부터 느낀 답답한 감정은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두 번째 유적지에서부터 강박적으로 관광객들의 머릿수를 내게 묻고, 본인이 인원을 직접 세어본 후 마지막으로 다시 내게 인원수를 보고받는 완고한 태도 때문이기도 했다.
왜 협업자인 나를 믿지 못하나. 왜 본인이 모든 상황을 통제하려 하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는 순간 갑자기 떠오르는 게 있었다. 안내원의 모습에서 과거의 나를 보았다.
모 식품회사에서 매출, 매입 자료를 만들던 나. 정규직원들의 이유 없는 화풀이 대상이 된 계약직의 나. 그래서 소속 부서 직원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던 자존심 강한 나. 영업사원들의 거짓말에 속아 자료 신뢰도가 엉망이 된 이후 데이터만을 믿던 나. 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자료의 정확성에 집착하던 나. 혼자 모든 일을 처리하려다 큰 그림을 놓치고 숫자의 숲에서 헤매던 나. (결국 정규직원이 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직장을 그만두었다.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계약 직원에게 정규직원이 될 거라는 희망고문을 하던 사측의 비열한 모습은 언젠가 따로 적어 둘 기회가 있겠다.)
조직이 개인에게 책임과 권한을 달리 부여하는 이유는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함이다. 혼자 모든 일을 맡는 행동은 바보같은 짓이다. 개인이 사라져도 조직은 굴러간다. 당연한 명제를 몰라 회사 생활을 힘들어하던 내가 떠올랐고, 안내원을 보니 그저 씁쓸한 웃음만 나왔다. 밥벌이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람과의 접촉을 피할 수 없다. 심지어 프리랜서라도 마찬가지. 최대한 팀원이 없는 일자리를 알아보던 내 행동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2013년 10월 27일)
참으로 오랜만에 이 블로그에 들렀다. 2005년 처음으로 티스토리(예전에는 태터툴즈라고 불렀다.)를 사용한 기억이 난다. 블로그를 시작한 때부터 9년이 지나는 동안 나는 무엇을 했나... 과거의 내 모습이 부끄러워 이 블로그에 쓴 글들을 삭제하려 했지만 이것도 내 소중한 과거이기에 남겨두기로 했다. 다시 이곳을 찾아온 이유는 일기를 쓰면서 나를 치유하고 싶어서다. 어디서부터 꼬여버린 인생인지 모르겠지만 글을 쓰다보면 부지불식간에 원인도 밝혀지고 내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도 정리가 되지 않을까. 네이버 블로그에 끄적인 글은 천천히 옮길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