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생각나는 사람이 생겼다. 책에 집중이 안돼 불편하다.
(2014/07/07 23:30)
본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지키려 노력하는 사람을 알게 되었다. 오지랖 넓은 나는 저러다 제 명에 못 살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어떤 계기가 있을 것이다. 살면서 큰 일을 겪었거나, 아니면 정말로 영혼이 숭고한 사람이던가. 자꾸만 관심이 간다. (2014/07/09 19:50)
어제부터 외근을 시작했다.
여자인 내가 봐도 눈을 떼기 힘든 미녀가 건물 입구에서부터 인사를 건네며
내 휴대폰 카메라에 보안 스티커를 붙여준다.
직원들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망설임 없이 목례를 하고,
건물 밖에는
구석에서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를 나누는 남직원들
한 손에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무리지어 다니는 여직원들
네모 반듯한 사원증을 목에 걸고 반듯한 자세로 걷는 사람들
끝까지 내게 미소를 잃지 않는 담당 직원들
예전에 근무한 모 식품회사에서의 기억이 떠올라 숨이 막혀왔다.
상사의 부당한 지시
직장 내 뒷담화
편가르기
성차별
폭언
군대식 문화
따돌림
실적 가로채기
부서 이기주의
겉으로 보기에는 다들 밝고 반듯한 사람들이었다.
지나치게 공손한 사람을 보면 무서워진다.
2014/07/16 21:14
꽤 지난 이야기지만 고해성사를 하고 싶어 적는다. 5월, 봉사활동 대상자 어르신께 앞으로 연락을 드리지 못할 거라는 내용의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변명을 하자면 당시 나는 생계에 대한 걱정에 상담 치료까지 받느라 경황이 없어 어르신의 고충을 들어드릴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 할머니는 봉사활동이 끝나갈 즈음에야 마음을 열어 보이셨고, 공식적인 활동 기간이 끝난 후에도 나를 댁으로 초대해 저녁을 대접해주셨다. 이후 내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전화를 걸거나 문자 메시지를 보내셨는데 취업으로 신경이 곤두선 나는 어르신의 일방적인 연락이 마냥 달갑지만은 않았다. 이 글을 쓰는 지금 갑자기 어르신으로부터 가톨릭 기도문 책자와 묵주 반지를 선물 받았던 기억이 난다. 어르신이 벽지 도배를 새로 해달라며 OO씨가 기관에 압력을 넣으라고 나를 채근하실 때마다 불편했는데... 정작 사람을 도구처럼 취급한건 내가 아니었을지. 김 할머니는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어버린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앞으로 면대 면 봉사활동은 되도록 하지 않을 계획이다. 사람한테 상처 주고 싶지 않다. 봉사활동 온라인 모임에 내가 올렸던 글들을 지워버리고 싶다. (2014/07/20 17:08)
2014/08/10 12:50
지난 주 다시 어르신 댁에 들러 원고 교정을 보고 왔다. 어르신을 대하기 여전히 쉽지 않지만, 한 번 시작한 일은 제대로 마무리 짓는 게 도리겠지...
주말에 소개팅을 했다. 여러 가지 일로 속상해하는 내게 힘이 되어 주고 싶다며 친구가 주선해 준 자리였다. 번호를 교환하고 상대방을 직접 만나기 전까지 그쪽에서 나를 좋아하면 어쩌지 하는 고민을 할 정도로 나는 이성을 만날 생각이 없었다. 괜한 걱정이었다. 상대방은 나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 나는 묘한 기분에 빠져 주말 내내 폭식과 과수면에 젖어 지냈다. 화요일 아침 출근길, 지하철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볼살이 쳐지고 머리칼이 정돈되지 않은 삼십 대 여자가 꽉 끼는 원피스를 입고 힘없는 눈으로 물끄러미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2014/07/22 08:40)
(2008년 8월 10일에 쓴 글)
미래의 고급문화를 논하기에 앞서, 고급문화의 정의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키치의 정의에 착안하여 키치의 구성 원리와 반대되는 것의 조합을 고급문화로 정의하기로 했다. 키치는 한 분야에 국한된 용어이지만 그 특성이 수업시간에 배운, 대중문화의 ‘뽕’기운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키치의 특성을 통해 그와 반대되는 고급문화의 특성을 정의하기로 했다. 키치를 만드는 다섯 가지 구성 원리를 나열해보자면 아래와 같다. (http://kr.blog.yahoo.com/surkhun74/4624 참고)
1) 부적합성의 원리 : 본래의 목적뿐만 아니라 동시에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는 과정에서 형태, 크기, 형식적 내용 등이 부적절하게 결합되는 것.
2) 축적의 원리 : 형식, 내용, 기능 등의 밀집을 통해 스스로를 눈에 띄게 하는 것.
3) 공감각의 원리 : 다양한 감각 영역을 동시에 자극하는 것.
4) 중용의 원리 : 모든 영역에서 발견되는 이질적인 것들을 혼합하여 집단적 표준화라는 중간적 위치로 위치 시키는 것.
5) 쾌적함의 원리 : '편안하게 살자'는 사고방식으로 사물의 성격을 놀이에 가깝게 마구잡이식으로 선택한 것.
거꾸로 생각해보자면 이와 반대되는 것이 고급예술(=고급문화)이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키치의 속성을 통해 내가 간추린 고급문화의 정의는 “본질 그 자체만으로도 순수하게 가치가 성립될 수 있고 천박해 보이지 않아야 하며 오로지 한 감각 영역만을 자극하는, 이데올로기가 배제된, 다소 불편(쾌락과는 거리가 먼) 하고 대중들이 소유하기 힘든 무엇.”이 되겠다.
위 정의를 통해 인터넷이나 p2p를 통해 누구나 손쉽게 공유 가능한 모든 것은 고급문화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상, 음원, 서적은 고급문화나 고급예술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정보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는 추이를 생각한다면 미래로 갈수록 영상이나 음원, 서적의 접근성이 높아지면 높아지지, 낮아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 매체로 대체 가능한 모든 것은 미래의 고급문화가 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여기서 미래 고급문화의 범주가 단번에 압축된다. 매체가 전달해 주지 못하는, 하지만 인간이 가장 느껴보고 싶은 본질적인 욕구가 무엇일까. 바로 죽음이다. 우리는 영상매체를 통해 성욕과 식욕을 느끼지만, 죽음의 느낌만큼은 온전히 느낄 수가 없다. 기껏해야 영상매체 속 연기자의 모습을 통해 가짜 감정을 느끼는 것뿐이다.
죽음에는 생명이라는 개념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 천박하게 생각하려고 해도 천박하게 생각할 수 없으며 순수한 인간 본연의 말초적인 욕망이 내재되어 있다. 물론 내가 주장하려고 하는 것은 그냥 죽음이 아니다. 사고사나 돌연사가 아닌, 스스로의 의지로 목숨을 끊는 죽음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불치병으로 인한 죽음이나 예상치 못한 사고사, 명예살인을 제외한 죽음에는 이데올로기가 개입하기 어렵다. 애당초 뽕의 기운을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자살'이 어떻게 고급문화가 될 수 있느냐는 반론이 제기될 것이다. 잘 생각해보자. 과거에 비해 스스로 목숨을 끊기가 쉬워졌나?
복지 기관에서 친절히 독거노인들에게 매일 안부전화를 거는 세상이다. 누군가가 외딴곳에서 자살을 시도해도, 지나가던 행인이 이를 보았다면 휴대폰으로 119에 신고할 것이고 119는 GPS 시스템을 통해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외딴길을 자동으로 추적해 10분 내에 출동할 것이다. 미래에 기술이 발전한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는 방법이나 수단은 늘어날지 몰라도 자살을 시도하는 행위 자체는 더욱 어려워지지 않을까? 먼 훗날에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정부에서 평생 개인 프로파일을 만들어 자살 가능성이 높은 아이들을 감시하는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
갈수록 세력을 확장하는 종교 문제도 자살의 어려움에 한몫한다. 기독교, 천주교, 불교를 비롯한 대부분의 종교들은 자살을 터부시한다. 지금보다 문명이 더욱 발전할 미래에는 아프리카 오지에서도 컴퓨터를 사용할 날이 올 것이고, 그때쯤이면 이미 토속신앙이 아닌 불교나 기독교가 아프리카에도 굳건히 자리매김할 것이다. 다른 나라로 도피를 해도 자살이 거의 불가능해지는 시대가 온다는 말이다.
국가나 종교처럼 세력 있는 집단들은 왜 자살을 인정하지 않을까. 언제부터인가 국가는 개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개입해왔다. 국가에 속한 개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는 기존 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가장 극단적인 행동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자살이 더욱 힘들어지는 미래가 온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는 그 자체로 소수들의 전유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살이라는 행위 자체가 취향의 문제로 바뀔 수 있다는 말이다. 고급문화의 구별짓기와 취향의 구별짓기는 종이 한 장 차이다.
취향(취미)의 문제를 생각해보자. 취향을 정말 순수한 취향 자체로 생각할 수 있나? 우리는 먹고 자는 것을 취향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좋던 싫든 간에 취향으로 내가 타인으로부터 판단될 수 있기 때문에, 취향에도 구별짓기의 개념이 들어가 있다. 보보스족이 일반인들과 구별짓기 위하여 국내에서 즐기기 어려운 취미만을 추구했듯이.
우리는 특정 장르의 영화를 좋아한다던가, 특정 브랜드의 백을 구매하여 드러냄으로써 남에게 내 취향을 알린다. 그렇다면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고 기술이 고도로 발달하는 미래 사람들의 취향은 어떻게 바뀔까? 소비가 아닌, 남과 다른 행동을 취하는 것 자체가 취향이 될지도 모른다. 특히 그 행동이 남들은 쉽게 취할 수 없는 행동이라면 더더욱 고급스러운 취미로 인식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래의 자살은 누구나 할 수 없는 것, 즉 완벽하게 고급스러운 취향이 될 수 있다.
결국 힘겨루기 이야기이다. 자살이라는 행위 자체가 고급예술, 혹은 고급문화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소리다. 아름다움, 순수성, 표현성, 상징성, 현실성, 절대성이 완벽하게 들어가 있는 것이 자살이다.
조금 더 상상력을 발휘해보자면 자살이 고급문화가 되는 시대에는 이를 모방한 문화가 생길지도 모른다. 회사는 고객에게 돈을 받고 뇌의 일정 부분을 자극해주어 죽음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식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서비스가 고급예술이 될 수 있을까? 오히려 자살하는 행동 자체와 나누어져 저급문화가 될 가능성이 크다. 죽음을 느끼는 서비스는 누구나 돈만 있으면 여러 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살이 행위 자체는 한 번 밖에 경험할 수 없다. 특히나 자살이 강력하게 통제되는 미래에는 자살이라는 행위 자체가 굉장한 상징적, 우월적 의미가 개입되기 때문에 고급문화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예술이나 문화라는 것은 본질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외부적인 힘의 변화에 의해 상대적으로 정의되는 것이다. 뒤샹이 가져다 놓은 변기 자체에서 아우라를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다. 대부분 기존의 예술 체계를 뒤엎은 뒤샹의 행위 자체를 높이 평가한다. 자살도 같은 맥락이다. 어떻게 자살이 고급문화가 될 수 있지? 라는 물음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자살이 희소성을 갖게 되는, 고급문화가 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조건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남자는 히치콕의 영화를 보았다. 찌르레기가 가득한 장면을 본 순간부터 현기증을 느꼈다. 그때부터였다. 담배를 사러 편의점에 가거나 현금을 찾기 위해 은행에 들를 때 거닐 때면 새가 보였다. 거리에 새들이 이렇게 많았나. 남자는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면 얇은 벽지선 사이로 갇힌 새들이 보였다. 피곤한 탓이겠지. 그날 밤 남자는 검은 무리의 새떼가 자신의 심장을 쪼아먹는 꿈을 꾸었다.
불안해진 남자는 묘안을 떠올렸다. 스마트폰에 시선을 고정시키면 외출할 때 새를 볼 수 없겠지. 하지만 버스를 기다릴 때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꼭 한 두 마리의 비둘기가 눈에 밟혔다. 버스정류장의 비둘기들이 떼지어 그의 꿈속으로 찾아왔다. 야멸찬 눈매를 가진 비둘기와 눈이 마주치면 꿈은 끝난다. 그의 머릿속에 새에 대한 생각이 둥지를 틀었다. 식욕이 사라지고 몸은 야위어갔다. 계절이 끝날 때까지 남자는 대문 밖을 나설 수 없었다.
몇 달 후, 신문에 비둘기 150마리가 떼죽음을 당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경찰은 사건 현장에서 독극물이 섞인 사람의 살점을 발견해 수사에 나섰다고 전했다. (2013년 6월 27일)
어제 출근길에 전철에서 책을 읽다가 선반 위에 가방을 두고 내렸다. 환승역에서 내리자마자 손이 허전한 걸 알아차리고 역무원을 찾아가 내 사정과 함께 열차에 탑승한 시간, 가방 위치, 모양새를 설명했다. 역무원은 이리저리 전화를 걸었고, 나는 황망히 기다렸다. 하필 여행을 다녀온 다음날이라 지갑에 현금이 많았다는 사실을 떠올리니 속이 쓰렸다. 임대폰은 어쩌지, 당장 차비가 없는데 출근은 어떻게 하나, 카드 분실 신고는 빨리해야 하는데... 온갖 부정적인 상상을 하고 있는데 역무원이 가방을 찾았으니 수거한 역으로 직접 찾아갈 수 있겠냐고 물었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긴장한 마음이 쉽게 가라앉지 않아 의례적인 인사만 하고 환승역을 떠났다. 가방을 찾은 역에서는 내 주민등록번호와 연락처를 물었다. 역무원은 확인 절차를 끝낸 뒤 분실물이 있는지 살펴보라고 권했다. 지갑, 휴대폰, 노트 모두 그대로다. 슬슬 지각이 걱정되기 시작한 나는 "분실물 없습니다. 고맙습니다."라고 간단히 인사를 한 뒤 역을 떠났다. 뒤늦게 진짜로 고마운 마음이 밀려왔다. 바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성의껏 도움을 주셔서 감사하다. 성함이라도 여쭈어볼 걸 그랬다. (2014/08/21 09:01)
2014/08/25 08:23
짧지도 길지도 않은 사회생활을 하며 생긴 징크스 비슷한 게 있다. 초면에 내게 먼저 말을 놓던 사람들과는 끝이 좋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언니라고 불러"라며 친근하게 다가온 그녀들은 본인의 기분에 따라 존대와 반말을 섞는 경우가 흔했다. 물론 진짜 언니처럼 잘해주는 경우도 있었지만, 회사는 일을 하는 곳이다. 직급이 크게 차이가 나는 경우면 몰라도 (설사 그렇다 치더라도 회사 내 반말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손윗사람이 손아랫사람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먼저 말을 놓는 행동은 친근함보다 나이를 핑계로 상대방보다 높은 위치를 점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 나와 같지 않고, 말을 놓는 게 정말로 친근함의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기에 대개는 참고 넘어가지만 결국은 사이가 틀어져버리고 만다. 무례함이 일상이 된 세상이라서일까. 무례함을 친근함과 혼동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2014/09/02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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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가을이'는 최승자 시인의 시집, <이 시대의 사랑>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다.
최 시인을 생각하면 괜시리 마음 한 켠이 헛헛해지는데 이 감정은 시인과 비슷한 상황에 처한 내가 느끼는 연민 때문인지, 그녀가 노래하는 끝없는 절망 때문인지 헷갈린다. 부디 건강하시기만을 바랄 뿐
(2014/09/02 08:35)
2. 어렸을 적 나는 (어쩌면 지금도) 美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다. 초등학교 오학년 때 반에 무척이나 예쁜 친구가 있었다. 내가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가질 수 없을 정도의 미모를 지닌 아이였다. 외모만큼 유순한 성품을 지닌 친구 주변에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나는 친구의 습관이나 기호를 따르기 시작했다. 편지를 주고받으며 손글씨마저 예뻤던 친구의 글씨체를 흉내내고, 그녀가 좋아했던 연예인에 나도 열광하며, 친구 것과 비슷한 디자인의 점퍼를 사겠다고 고집을 부리며 시장통에서 엄마에게 울고불고 짜증을 냈다. 그녀는 일종의 워너비인 셈이었다. 친구와 비밀일기를 쓰고 편지를 교환하던 나는 우리가 절친한 사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왜 친구는 나와 친하게 지내는 걸까. 나는 그녀보다 나은 게 없다고 생각했다. 가끔 ‘넌 공부를 잘해서 좋겠다’는 글을 편지에 적어주긴 했지만, 우리는 성적보다 외모의 차이가 월등히 컸기에 그런 말은 내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도리어 친구가 나를 추켜세우는 모습은 외모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도 내가 그녀보다 한참 부족하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같은 중학교에 진학했지만 그녀를 따르는 동성, 이성 친구들이 늘어가면서 우리 사이는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질투를 느꼈다. 주고받던 편지는 뜸해졌고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우리는 연락이 닿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 TV나 잡지 화보를 숱하게 보더라도 친구만큼의 미모를 가진 연예인은 없었고 내 마음에 그녀의 이름 석자는 꽤 오랫동안,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와 동의어로 자리잡았다.
십년이 넘게 흐른 후 우연히 시내에서 마주친 친구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휴대폰 번호를 교환한 뒤 같이 차를 마시며 사는 이야기를 주고 받던 나는 아쉬움을 느꼈다. 살짝 찌푸린 미간과 치켜올라간 친구의 눈썹에서 삶의 피곤함이 보였다. 친구의 부드러운 입술에서 ‘지랄’이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에는 허탈함마저 느꼈다.
3. 그리고 금각사
4. 아버지의 얼굴은 초여름의 꽃들에 묻혀 있었다. 꽃들은 여전히 기분 나쁠 정도로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꽃들은 우물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했다. 왜냐하면, 죽은 사람의 얼굴은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이 지니고 있던 존재의 표면으로부터 무한히 함몰되어, 우리들을 향하고 있던 탈의 테두리 같은 것만을 남기고, 두 번 다시 끌어올릴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곳에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물질이 얼마나 우리들로부터 멀리 존재하며, 그 존재 방법이 얼마나 우리들로부터 소원한가 하는 점을, 죽은 사람의 얼굴처럼 여실히 설명해 주는 것은 없었다. 정신이 죽음에 의하여 이토록 물질로 변모함으로써, 비로소 나는 그러한 국면에 접하게 되었으나, 지금 나에게 서서히, 5월의 꽃들이라든지, 태양, 책상, 학교 건물, 연필…… 그러한 물질들이 어째서 그토록 나에게 서먹서먹하고, 나로부터 먼 거리에 존재하는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편, 어머니와 단가 사람들은 나와 아버지와의 마지막 대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 대면이 암시하는, 살아 있는 자들이 속한 세계의 유추를, 나의 완고한 마음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면이 아니라 나는 단지 죽은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있/었/다. 시체는 다만 보/여/지/고/ 있/었/다. 나는 다만 보고 있었다. 본다고 하는 것, 평소에 아무런 의식도 없이 하고 있는 대로, 본다고 하는 것이, 이토록 살아 있는 자의 권리의 증명이며, 잔혹함의 표시일 수도 있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참신한 체험이었다. - 36p (2014/09/11 11:14)
내 생각을 글이나 말로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꽤 오랫동안 블로그에 일기를 쓰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머릿속에 생각의 찌꺼기들이 엉켜붙은 느낌인데 이것도 병증인지는 잘 모르겠다. (2014/10/19 09:18)
(2014/10/27 19:47)